이런 北核합의 왜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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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의 핵개발 계획에 관한 제8차 남북 장관급 회담의 합의문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북측으로부터 핵 의혹에 대한 분명한 해명을 듣고 북·미 간 제네바 기본합의서의 이행을 다짐받겠다던 우리 대표단의 회담 목표는 반영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북핵 문제가 대화를 통해 해결되도록 북측과 협력해야 하는 얄궂은 합의상의 의무만 지게 됐다.

우선 "남과 북이 핵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대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적극 협력하기로 한다"는 합의문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 문장만 보면 핵문제가 어느 쪽, 그리고 어떤 핵문제인지가 불분명하다. '북측 핵'이라고 명시도 못한 합의문을 만들기 위해 하루를 더 보낸 이유가 뭔가. 또 농축 우라늄 핵개발 계획이라는 당면 최대의 현안이 '모든 문제'의 범주로 물타기되어 북측이 주장하는 일괄타결의 방식을 우리 측이 사실상 수용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협력까지 하도록 되어 있다. 더군다나 북측은 방송을 통해 제네바 기본합의서의 준수를 미국에 거듭 촉구하고 있는데도 우리 대표단은 북에 그 이행을 약속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런 기이한 합의를 한 것은 김대중대통령이 오는 26일 멕시코에서 열릴 한·미·일 3개국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대화를 통해 해결할 의지를 보였다고 미국을 설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선(先)핵개발 폐기, 후(後)일괄타결의 해결방식을 갖고 있는 미국이 우리의 두루뭉수리식 해결방안에 응할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대화를 통한 해결이 기본원칙이나 그 전제는 선 핵개발 폐기라는 게 미국뿐 아니라 우리의 입장이기도 하다. 문제는 또 있다. 북측이 이런 모호한 합의문을 핵의혹 해결 과정에서 '피난처'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북·미 간 절충역으로 나설 때 '대화를 통한 일괄타결'이 오히려 북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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