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 평화적 해결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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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한에 대해 최근 많은 사람들이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나타나고 말았다. 특히 '햇볕 정책'이라는 북한에 대한 일종의 신앙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우리가 선의로 대해주면 북한은 반드시 화해와 개방의 방향으로 나올 것이라고 믿고 지난 몇년 동안 북한 돕기 노력에 모든 열정을 퍼부어 왔는데 북한은 이들 북한을 돕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켈리 특사에게,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 사업을 계속해 왔다고 통고하다시피 했다.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북한의 타이밍은 절묘했다. 미국이 이라크 문제로 북한에 대해 어떤 강경한 제재도 취하기 힘든 순간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정일이 최근에 보여준 개방을 지향하는 듯한 제스처의 효과가 아직 사라지기 전에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시인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반응을 약화시키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하지 않은 점은 북한이 자신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시인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하나도 확증은 없다. 그런데 북한을 제외한 모든 다른 나라들은 '평화적인 해결'을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북한이 택한 타이밍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평화적 해결'을 말하는 것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현실적인 옵션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평화적 해결을 말하는 것은 다분히 레토릭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본은 다른 어떤 옵션도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한반도의 지정학적 균형 문제에 깊숙하게 개재돼 있다.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이 그만큼 한반도의 비핵화 목표와 평화를 동시에 성취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정책은 희망만으로는 안된다. 바람을 현실로 전환하는 것이 정책이다. 평화적 해결은 전쟁이라는 정책수단을 적용하지 않고도 핵무기 확산 방지라는 목표를 현실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정책 수단으로서 전쟁과 평화를 서로 배타적인 대안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전쟁은 정치 외교적 수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평화적 수단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경우에는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외교적 협상을 진행하는 경우에도 군사적 수단의 동원 가능성이 협상의 과정과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평화적 해결을 부르짖는다 해도 군사적 수단의 동원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화적 해결의 이중적 의미는 우선 북한이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 지금 미국이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다고 해서 전쟁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평화적 해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군사적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 점은 우리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평화를 말하는 경향이 있다. 정상회담 한번하고 항구한 평화가 보장되는 것처럼 떠들고 냉전 사고만 안하면 모든 갈등이 다 사라지는 것처럼 큰소리치곤 한다.

평화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불확실한 힘의 균형 사이에 비교적 안정된 방정식을 찾아내야 한다. 특히 이번에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무시하고 세계를 속여온 사실 때문에 앞으로 어떤 합의점에 도달한다 해도 확인 체제에 대한 작업이 엄청나게 어려울 것이다. 다만 93∼94년에 비하면 북한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크게 증대됐기 때문에 한·미·일, 그리고 중국·유럽이 공동보조만 유지한다면 북한도 핵무기의 비확산 체제를 위협했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대실험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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