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핵파문]'核개발 어디까지 갔나'부터 밝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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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네바 핵합의는 백지화되는가. 북한 신포의 경수로 원자력발전소 건설공사는 중단되는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파산하는가. 2000년 평양과 2002년 부산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외친 화해와 통일의 소망은 덧없는 것인가.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 회담을 취소하는가….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핵합의에 서명하고도 비밀리에 핵개발을 계속해 왔다는 이실직고(以實直告)를 듣고 벼락같이 떠오르는 의문들이다.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한 사람은 북한 외무성의 강석주(姜錫柱)제1부상이다. 상대는 지난 4일 평양을 방문한 미국 국무부의 제임스 켈리 차관보다. 강석주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 핵합의를 서명한 몇년 뒤에 새로운 핵개발을 시작했다고 짐작한다. 국무부 대변인도 미국은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한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제네바 핵합의는 북·미대화와 북·일대화는 물론이고 한국 햇볕정책의 할아버지쯤 된다.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한국·미국·일본이 북한의 신포에 경수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 중이고, 미국이 해마다 50만t의 중유를 제공하고 있다. 제네바 핵합의가 없었다면 2000년의 남북 정상회담과 그 후의 후속 남북대화를 상상할 수 없다.

북한은 한편으로는 핵이라는 가공할 대량살상무기를 연구·개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금강산 관광객을 받았다.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을 실컷 가지고 놀았다. 김정일(金正日)-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회담에서는 북·일 관계정상화 회담에 합의했다.

제네바 핵합의는 북한 핵개발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94년의 시점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계획을 중단한다는 데만 합의했다. 그 때 그 부분은 핵합의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됐다.그러나 클린턴 정부는 북한을 일단 믿어보자는 "신뢰의 비약"이라는 논리로 핵위기를 해결했다. 그 신뢰가 허망한 것이었음이 북한 스스로의 고백으로 드러났다.

명분만 가지고 말하자면 북한이 핵개발을 당장 중단하고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사찰을 받을 때까지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중단하고 북한을 압박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미국 특사에게 비밀 핵개발 계획을 시인한 것은 더 이상 감추기 어려운 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문제를 대화로 풀자는 고도의 전략으로 보인다. 북한은 핵무기를 통한 생존전략을 포기하는지도 모른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보이는 것은 다행 중 다행이다. 북한은 분명히 적극적인 동기를 가지고 핵무기 개발계획을 시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확실히 추궁할 것이 있다.몰래 진행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밝혀야 한다. 이것이 협상의 출발점이다. 이것은 북한의 고백만으로는 안된다. 북한 핵시설에 대한 의문을 남기지 않는 사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미국의 압박 일변도를 경계한다. 한국·미국·중국·일본의 공조가 절실하다. 북한 핵은 김대중 정부가 남아 있는 외교적인 역량을 모두 쏟아부어야 할 만큼 심각한 도전이다.

y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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