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 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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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며칠 전 베를린의 한 맥주집에서 옆 자리의 독일인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그 중년 신사와의 대화는 남북 대화에서 시작해 축구 얘기를 거쳐 종교 문제까지 흘러갔다. 한국의 불교와 기독교 신자 수가 엇비슷하다는 설명에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그 흔한 종교 간 다툼이 없느냐는 것이다. 물론 일부 광신도들이 문제를 일으키고는 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는 말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지구상의 어느 종교도 불화와 갈등을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의 사랑에 해당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요, 이슬람교의 평화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반목과 전쟁을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경험했다. 특히 종교전쟁이 그 어떤 전쟁보다 잔혹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에 걸친 종교전쟁은 십자군 전쟁이다. 1096년 교황 우르반 2세의 성지 탈환 선언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1270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치러졌다. 당시 전 유럽이 기사단을 보내 아랍 측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1차 때 외에는 성지 탈환에 실패했다. 결국 이로 인해 교황의 권위가 쇠퇴하는 등 유럽은 중세를 마감하게 된다.

역사상 최대의 종교전쟁은 신·구교 간의 30년전쟁(1618∼1648)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독일 소군주들 간의 영토 쟁탈전 성격도 강했던 이 전쟁으로 전장(戰場)이었던 독일은 참담한 피해를 보았다. 국토는 철저히 파괴됐고, 인구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크면 당한다'는 피해 의식으로 독일은 수백 개의 자잘한 영방(領邦) 국가로 쪼개졌고, 이는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 때까지 계속됐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된다'고 일찍이 갈파한 사람은 그리스의 투키디데스였다. 이데올로기 전쟁의 시대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종교전쟁의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게 요즘 국제 상황이다.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 때문에 싸운다. 물론 이번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은 아랍권 전체와의 싸움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결코 종교전쟁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종교전 성격이 강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알 카에다가 유력한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발리섬 테러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이런 와중에 엊그제 김수환 추기경이 청담 스님 탄생 1백 주년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종교 간 화해란 이처럼 타 종교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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