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백악관 브리핑룸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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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촬영기자들이 몰려든 가운데 이날 처음으로 두 달 동안 비어 있던 ‘로열석’에 앉은 사람은 AP통신의 40대 여기자 제니퍼 로벤이었다. 8년째 백악관을 출입 중인 그는 동료들의 새삼스러운 축하 인사가 어색한 듯 겸연쩍게 웃었다. 그렇지만 상기된 그의 얼굴에서 새 자리가 주는 중압감·책임감 등을 느끼는 건 어렵지 않았다. 1일 백악관 출입기자협회(WHCA)가 AP통신을 선택하기 전까지 토머스의 자리는 저마다의 이유를 내세운 언론사들의 치열한 각축 대상이었다.

로벤이 이어받은 것은 토머스의 자리만이 아니었다. 그는 첫 번째 질문권도 얻었다. 기브스 대변인을 상대로 멕시코만 기름 유출 상황에 대해 세 차례나 물었다. 로이터통신과 CNN, NYT 등이 뒤를 이었다. 첫 번째 열부터 차례로 질문을 받던 기브스는 세 번째 열 중간쯤에서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생큐, 친구들”을 외치고 브리핑룸을 떠나버렸다. 여러 차례 손을 들던 뒤쪽 열의 기자들도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의 경우 청와대를 비롯해 관공서 브리핑룸 어디에서도 이 같은 시스템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정석과 우선질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이건 신문이건 인터넷 매체건 크게 보아 모두가 동일한 무게의 한 언론 매체일 뿐이다.

어느 한쪽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뒤쪽 열에서 열심히 손을 들어 보던 백발의 노(老)기자를 보면서 기브스가 야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정부가 추진했던 ‘기자실 폐쇄’ 논리에 익숙해진 쪽이라면 기성 언론의 텃세가 한국보다 더 심하다고 느낄 만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곱씹어 볼 점은 있다. 국민과의 접촉이 많은 매체, 두터운 신뢰와 권위를 쌓아 온 매체에 대한 존중의 모습이다. 미국인들은 진실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깊이 있는 보도를 위한 불철주야(不撤晝夜)의 노력이 오늘날의 NYT와 WP를 만들었다는 데 공감한다. 그래서 이들이 백악관 브리핑룸의 앞쪽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날 세 번째 열에서 두 번째 열로 승급(?)한 NPR(공영라디오방송)은 “그동안의 노력으로 청취자들에게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할 기회를 갖게 됐다”며 반색했다. 나에게 그들은 자리 다툼이 아닌, 좋은 언론 만들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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