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통일 드라마의 라스트 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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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연극에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그 연극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첫 장면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암시함으로써 관객의 관심을 붙잡아 둔다. 마지막 장면 역시 중요하다. 관객은 이 마지막 장면을 마음에 담아 그 연극을 추억으로 간직한다. 대통령 역시 연극의 이러한 속성을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취임 후 1백일이 중요하고 정권 마지막 몇개월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정권의 주연인 DJ도 불과 몇개월이면 역사 속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고 이제 추억으로만 남게 된다. 좋은 추억으로 역사 속에 남을 수 있느냐 여부는 남은 몇개월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DJ의 업적을 물으면 제일 먼저 꼽는 것이 그의 통일정책이다. 그것으로 노벨상까지 받았다. 그의 통일극의 첫 장면은 미심쩍은 점(낮은 단계의 연합제와 북한의 연방제가 비슷하다는 문구)이 없지는 않았지만 가슴 떨리는 장면이었다. "이제야 한반도가 달라지는구나, 남북 사이에 무엇이 이루어지는구나"하고 생각했다. 특히 진보진영에서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영화인 문성근은 6·15선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 김대중이 6·15선언을 하면서 국민 여러분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얼굴에서 못느끼셨습니까. '국민 여러분, 저더러 빨갱이라고 그러셨죠, 아닙니다. 저 빨갱이 아닙니다. 이제 믿어 주시겠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겁니다. 이렇게 화해하고 교류 협력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얘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 선생의 첫번째 한(恨)인 용공조작은 김대통령 스스로 6·15선언으로 극복해 내고 있다는 말입니다"(주대환,『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 38쪽)

그렇다. DJ 통일극의 첫 장면은 이렇게 흥분되고 기대에 찬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임기를 몇달 남겨두고 벌어진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의 두 비서실장이 바로 그 감명스런 장면을 만들기 위해 북한에 뒷돈을 댔다는 주장이나 그의 통일극의 성공을 위해 국방부 장관이 서해에서 벌어질 교전 징후를 삭제했다는 주장들…. 연극이 끝나가는 지금 이 순간, 국민은 혼란에 싸여 있다. 북한으로 넘어간 뒷돈 때문에 서해에서 우리 장병들이 그렇게 당하지 않았나 하고 은행장이 밤잠을 못잤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헌법 제69조)"라고 선서한 대통령의 주변에서 불법자금을 만들어 북쪽에 보냈다?

국민은 알고 싶다. 지금 폭로되고 있는 이 일들이 사실인가 거짓인가? 폭로한 정보부대장이 "진실은 하나 뿐이다"고 했듯이 이 내용들이 맞느냐 틀리느냐 답은 하나뿐이다. 이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주인공인 대통령 자신일 것이다. 나는 대통령의 입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왜냐, 그가 우리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통일이 중요하다 해도 국가란 자존심이 있는 법이다. 우리 대통령이 뒷돈을 찔러줘 가며 만나 달라고 애걸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북한은 도와야 한다. 쌀도,옷도,약도 주고 공장도 지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준 돈으로 무장을 강화해 우리를 위협케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우리 대통령 주변에서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고 싶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 입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 나와도 할 수 없다고 본다. 대통령으로서 철학이요,소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뒷돈을 주더라도 만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련과 수교하기 위해서도 30억달러를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불법에 대해서는 책임지겠습니다. 지금은 대통령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재직 중에는 형사적 소추를 당하지 않으나(헌법 제84조) 이 자리를 떠나면 책임질 일은 책임을 지겠습니다."

나는 DJ의 통일극이 이렇게 멋지게 막이 내리기를 바라고 있다. 통일이 그렇게 절실했다면 이렇게 떳떳이 밝힐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멋진 라스트 신을 만들 수 있다면 그의 통일정책을 국민은 호불호를 떠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세여야만 그를 지지하던 진보 진영에도 통일 우선의 명분을 주는 것이다. 지금같이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막을 내린다면 "자기 노벨상 타려고 그랬구나"라는 얘기밖에는 들을 것이 없다. 좋았든 싫었든 그가 5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역사 속에 좋은 이미지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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