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몰려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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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에 대한 영향력에서는 중국이 최고라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지지난해의 남북 정상회담을 포함해 남북대화가 여기까지라도 진행된 것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작용'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는 인상을 감추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됐다.

그러나 지난 이틀 동안 서울에서 열린 한국·러시아 포럼 러시아측 참가자들이 밝힌 북한·러시아 관계의 현주소를 들어보면 오늘의 북한은 대외관계에서 중국보다는 러시아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난달 북·일 정상회담의 성사에는 러시아의 역할이 컸다.

모스크바의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은 올해 들어 벌써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를 스무번 이상, 정확히는 스물세번(!) 만났다. 이런 예비정보를 가지고 러시아의 로슈코프 외무차관과 톨로라야 외무부 아시아1국 부국장에게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러시아가 북한과 일본 사이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를 물었다.

로슈코프 차관이 지난 6월 일본을 방문했다. 그때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외상은 로슈코프 차관에게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한다는 뜻을 북한에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의 희망은 북한에 전달됐다. 이바노프 외무장관이 7월 말 평양을 방문했을 때 金위원장은 북한도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金위원장의 뜻은 며칠 뒤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시아지역안보포럼(ARF) 회의에서 가와구치 외상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이바노프 외무장관은 미국의 파월 국무장관과 북한의 백남순(白南淳)외무상의 짧지만 의미있는 만남을 주선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6월 말 캐나다 카나나스키스의 G8정상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金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메시지는 바로 평양에 전해졌다. 푸틴과 金위원장은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 북·일 관계를 깊이 논의하고 8월 30일 북한과 일본은 북·일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했다. 고이즈미는 바로 푸틴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말을 했다.

북한이 대외관계에서 돌파구를 찾는데 중국보다 러시아의 도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장쩌민(江澤民)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푸틴의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북한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인데 북한이 보기에 미국 대통령 부시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장쩌민이 아니라 푸틴이다.

러시아는 이렇게 우리가 중국을 주목하고 있는 사이에 북한을 통해 한반도문제에 깊이 발을 들여놓았다.고이즈미는 金위원장에게 한반도문제에 관한 4자회담을 러시아와 일본이 참여하는 6자회담으로 확대하자고 제의해 러시아의 도움에 보답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6자회담을 희망해 왔다.

로슈코프 차관에 따르면 러시아는 1994년 북한에 6자회담을 처음으로 제의했다. 북한은 반대했다. 다른 소식통의 해석으로는 북한은 무엇보다 일본이 한반도문제에 끼어드는 것이 싫어서 6자회담에 반대했다. 러시아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6자회담 구상을 보류했다.

그러나 북·일 관계의 개선으로 사정이 달라져 러시아는 6자회담을 재론하기 시작했다. 로슈코프 차관은 지난주 모스크바에서 미국 대사와 6자회담을 논의했다. 그는 미국의 입장이 아직은 미지수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한국과 중국은 6자회담을 희망하는 러시아와 일본을 지지한다고 믿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한반도와 연결하는 데도 열성적이다. 6자회담을 통한 포괄적인 영향력 확보와는 달리 철도 연결은 경제적인 이해가 걸린 문제다. 러시아가 한국에 지고 있는 빚 15억달러를 러시아가 북한의 철로개선을 지원하는 경비 20억달러에서 탕감하자는 아이디어도 진지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긴장완화의 어느 단계에 가면 러시아와 일본의 참여는 불가피하다. 그것이 6자회담이 될 것인지 4+2의 형식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북한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지금의 변화를 보면 한반도문제 논의의 국제화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무섭게 달려온다. 미국의 경직된 대북정책이 초래한 정책의 공백을 메울 기세다. 서둘러 러시아와 일본에 대한 입장을 재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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