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달러 규명' 정부 하기 나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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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빌린 4억달러가 북한에 비밀 송금됐다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제기된 지 1주일이 지났다. 그러나 그 사이 여러 의혹만 눈덩이처럼 커졌을 뿐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 국민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가 이런 의혹을 풀 의지가 없는 듯하다. 청와대부터 그렇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1일 "법적인 근거가 없는 계좌추적이나 장부 공개는 안되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이나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도 "계좌추적권 발동은 어렵다"고 했다. 현대상선에 4천억원을 빌려준 산업은행도 금융실명법상 자금거래 내역을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당사자인 현대상선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면 누가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다행히 감사원은 산업은행에 대한 감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반나절이면 가능하다"고 하는 진실 규명을 위해 2주일 남짓 준비를 한 뒤 14일부터나 감사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정부의 급선무는 하루라도 빨리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의혹의 핵심이 국가의 안보·미래와 직결된 통일·대북문제여서 더욱 그렇다.

감사원보다 각종 금융거래 조사에 전문성을 갖춘 금감위·금감원이 이번 의혹을 밝히는 데 제격일 수 있다. 산은의 대출금이 북한에 송금됐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금융 거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출 당시 산업은행 총재였던 이근영씨가 위원장·원장(겸임)으로 있는데 금감위·금감원 직원들이 그의 눈치를 보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설령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더라도 상당수 국민은 공정성·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따라서 李위원장은 이번 일에 손을 대기보다 금감위원장이 아닌 전직 산은 총재로서 감사원 감사에 성실히 응하는 것이 낫다.

감사원법은 감사원에 자금흐름을 추적할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감사원이 중심이 돼 계좌추적 기법과 노하우를 보유한 금감원 직원, 부당 내부거래 조사 경험이 풍부한 공정위 직원 등이 가세해 합동조사반을 편성한다면 이번 의혹은 더 빨리 가려질 것이다. 결국 의지의 문제다.

ksl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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