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 땅 개발이익금 1,370억弗 돌려달라" 美정부, 인디언 소송에 진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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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50여년 전 미국 몬태나주 내 '블랙피트(검은 발)' 인디언 마을의 어느날 저녁. 한 소녀가 할아버지에게서 얘기를 듣는다. "나도 어릴 때 들었단다. 오래 전 백인들이 땅을 빼앗으면서 '땅을 개발해 돈이 생기면 나눠주겠다'고 했다지. 그런데 아직 변변한 돈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이젠 전설이 되고 말았지."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커서 돈을 되찾겠다"며 인디언의 명예를 걸고 약속했다.

오늘날 미국 역사상 최대 금액인 1천3백70억달러(약 1백64조원) 규모의 소송이자, 미 정부에는 악몽일 수도 있는 '인디언 신탁기금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엘로이세 코벨이란 이름의 이 소녀는 몬태나 주립대를 졸업, 은행 간부를 거쳐 블랙피트 인디언보호구역의 재무책임자로 추천된다. 은행의 고액 연봉을 마다하고 1990년대 초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마침내 꿈꿔왔던 약속을 실천하겠다고 나선다. 우선 그녀는 1887년 미 의회가 전국에서 총 50만평의 인디언 땅을 사실상 몰수하면서 "개발 이익금으로 기금을 만들어 돈을 나눠주겠다"며 '신탁관리법(Dawes Act)'을 만들었음을 확인했다. 처음엔 돈을 조금씩 나눠줬지만 곧 흐지부지돼, 이 법은 결국 인디언 땅을 가로채는 수단이 됐다는 것도 알아냈다.

미 정부의 부실한 기금관리 실태를 내무부에서 확인하던 중 그녀는 직원으로부터 "글도 못읽는 인디언 주제에…"라는 모욕적인 말도 들었다. 분노한 그녀는 미 전역 인디언 부족들의 협조로 '몰수된' 땅에서 그때까지 이뤄졌던 온갖 사업들의 과거수익을 계산해 냈고, 마침내 96년 "정부는 1천3백70억달러를 인디언 후손들에게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처음엔 화젯거리로 치부되던 소송은 법원이 인디언의 권리를 확인하고 환급액 산정을 위한 서류들을 정부에 요구하자 심각해졌다. 다급해진 당시 빌 클린턴 정부는 관련 서류를 폐기하고 허위 증언을 하는 '악수'를 동원하다 내부자 고발로 들통났고, 후유증으로 제임스 루빈 당시 재무장관 등이 사기·법정모독죄 판결을 받고 말았다. 그나마 일부 서류를 복원해 '현재 기금 잔액이 4억5천만달러, 관리 중인 땅은 1천1백만 에이커'라는 것만 알아냈다.

'뜨거운 감자'를 물려받은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시간만 끌어오다 지난달 말 게일 노턴 내무장관이 법정모독죄 판결을 받았고, 내년 1월까지 기금내역을 밝히지 않으면 구속될 수 있다는 최후 통첩까지 받았다. 노턴 장관은 "서류도 죄다 없어졌는데 1백년 내역을 어떻게 복원하며, 또 한해 연방예산의 7%나 되는 보상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며 하소연한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joon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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