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돈'의혹, 청와대 안이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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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현대상선의 4천억원 대북 지원 의혹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은 참으로 안이하다. 어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한나라당의 의혹 제기를 '정략적 공세'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산업은행과 현대상선의 금융거래에 대해 청와대가 나서서 설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법적 근거 없는 계좌추적이나 장부 공개는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朴실장의 주장은 민심의 흐름과는 딴판이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무렵 산업은행에서 빌린 돈의 행방을 철저히 추적하라는 것은 국민적 요구에 속한다. 대통령의 행위와 관련된 국정 의혹을 해소하는 것은 청와대가 앞서 해야 할 기본 책무다. 그런데도 의혹 제기를 정략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진상규명의 의지 부족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특히 "법적 근거 없는 계좌추적은 안된다"는 부분은 월권(越權)논란을 일으킬 만하다. 그동안 금융감독원은 "일반기업에 대한 계좌추적은 불공정거래 조사 목적이 아닌 이상 금융실명제법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현대상선 탓에 부실 요인이 늘어난 산업은행을 검사하는 연장선상에서 계좌추적을 할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미스터리를 파헤치겠다는 의지며, 규명 수단인 계좌추적의 요건을 확대해석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朴실장의 발언이 원론적 언급이라 해도 금감원의 행동을 제약하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더구나 6·15회담 성사에 막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그였기에 발언의 부적절함을 더하고 있다.

정치적 공방으로 뒷거래 의혹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 "DJ의 노벨상 욕심과 김정일의 돈 욕심이 맞아떨어진 것"이라는 한나라당의 험악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서도 청와대가 나서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청와대는 진상 규명을 임기 말 국정의 우선순위로 다뤄야 한다. 그것이 청와대가 다짐해온 '남북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음 정권에 넘겨주기' 위한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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