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조국애 다시 만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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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연극배우 원영애(40)씨는 닮고 싶은 여성 한 사람이 있다. 지난 5년간 짝사랑을 해온 정정화 여사다. 정씨는 이미 1991년 세상을 떠났으니 그 사랑을 알아줄 리 없지만, 그녀에 대한 원씨의 사랑 공세는 점점 더해지기만 한다.

"정여사는 시대의 사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 그러나 그녀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없었으면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살림은 아마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씨는 백범 김구가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여성 독립 운동가다. 열살 때 나라을 잃자 독립운동을 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해 해방 조국을 볼 때까지 26년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 사이 여섯차례나 국내에 잠입해 독립자금을 조달하며 독립 운동가들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원씨는 5년 전 정씨의 수기 '장강일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그녀의 삶을 연극으로 꾸미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보낸 정씨의 여정을 따라가며 97년 그녀의 삶의 흔적을 돌아본 뒤 이듬해 원씨는 자신이 직접 제작하고 출연한 '아,정정화'를 선보였다. '정정화 사랑'이 첫 결실을 본 것이다.

그 뒤 '치마'로 이름을 바꿔 재작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뒤 초연 4년 만에 원씨는 이 작품을 일본 무대에 올렸다.

지난 8월 오사카와 도쿄에서 공연을 펼쳤다. 원씨는 "반응은 대단했다. 일본인들의 아픈 역사를 들추는 일이어서 거부감을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한낱 기우였다. 공연이 끝난 뒤 내게 찾아와 '한국의 잔다르크'에 대한 정보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며 떼를 쓰는 여고생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원씨의 이런 도전은 '현대판 독립운동'인지도 모른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아픈 기억을 직설적으로 다룬 연극이 일본 무대에 오른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산케이(産經)신문은 "'난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 없었던 탓이다'라는 일기의 문장에서는,정씨의 겸허하고 정직한 인품이 나타난다"고 소개했다.

원씨는 이런 성과를 한국 관객과 고루 나누고 싶어 오는 18∼27일 서울 연강홀 공연을 비롯해 경기도 지역을 도는 순회공연을 펼친다. 광주(5∼6일)·평택(9일)·과천(29∼30일)·파주(11월 1∼2일) 등지에서 열린다. "명예와 금력,권력만이 가치있는 요즘 세상에 정씨의 삶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주는 거울이다. 일제시대 보장된 권력과 막대한 재산을 마다한 채 평생 가난했던 그녀의 삶이야말로 경종이 아닌가."

이같은 사명감 때문인지 스스로 주역을 맡은 원씨의 연기는 꽤 사실적이다. 감정의 몰입도 깊은 편이어서 여느 상투적인 인물 드라마와는 거리가 있다. 원씨는 "돈을 목표로 한 상업극이 대세인 현실에서 이런 비상업적인 드라마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치마'의 공연은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치마'는 이재상 구성·이기도 연출로 원씨 외에 주진모·나제균·최홍일·전국향·송바울 등이 출연한다. 연강홀 공연시간은 평일 오후 7시 30분,금·토 오후 4시·7시 30분,일 오후 3시. 02-704-9566.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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