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도 질리시죠 도토를 만나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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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책마을 가는 길엔 우리가 미처 값을 매기지 못한 보석, 흘리고 간 구슬이 적지 않습니다. 직접 책을 만든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아까운 글들을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어깨 힘을 빼고 이른 아침길을 산책하듯 함께 떠나실까요?

편집자

우리 시대 대표적 문화코드는 '엽기'다. 어떤 장르든 기발하고 자극적이어야 관중이 몰리고 독자가 꼬인다. 그러다 보니 머리로 맥주병을 깨는 토끼를 보며 깔깔대고 자신의 토사물을 도로 삼키는 아가씨를 만나도 손뼉을 치며 뒤집어진다. 뭐, 그런 것도 괜찮다. 어지간히 튀는 것으론 각박한 경쟁에 지친 현대인의 눈길을 사로잡기 어렵다는 점이 이해가 가니까.

하지만 늘 자극적인 것만 취할 수는 없다. 아무리 맛난 고기라도 매일 그것만 먹을 수는 없고 삼복더위라도 청량음료만 마시고 살라면 누구든 고개를 저을테니 말이다. 기괴하기까지 한 것을 읽고, 보며 환호하다가 문득 산나물이나 샘물같은 순수가 그리워질 때면 도토를 만나자.

도토는 눈과 입만 달린 네모난 얼굴에, 몸통은 없이 팔 다리만 가진 못난이다 (건빵별에서 혼자 살다 지구에 온 지 얼마 안됐다니 어디선가 본 듯한 시작이지만 용서하자). 별난 재주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좋아하는 이를 말없이 기다리기, 마음졸이기, 말 못하고 얼굴 붉히기 정도다.

이런 도토가 사랑에 빠졌다.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엮어질 리 없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끌탕만 한다.

일상적으로 '그녀'를 만나는 그녀의 가족·친구·선후배들이 부러워 기껏 건수를 생각해 내고도 "안되면 말고…"식으로 말을 건네고 만다. 그녀가 먼저 전화할 확률은 거의 없는데도 휴대전화의 '부재중 통화'메시지를 보면 그녀일까 싶어 마음 설렌다. "여자는 많아"라고 위로하는 친구에게 "그녀는 항상 최곤데… 열명 중 최고라도 힘들텐데 수십억명 가운데 최고라면 아찔하다"고 읊조리는 도토.

도토의 '열병앓이'를 일기식 줄글로 정리한 이 책은 맑고 곱긴 하지만 고(故)정채봉 선생의 수필집같은 깊이는 없다. 대신 읽다 보면 우선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다가 종내는 "힘내라 도토"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어진다. 마음의 울림이 생기는 셈이다.

도토를 지구에 데려온 이는 광고회사 직원으로, 직업적으로 글을 쓰거나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겸손 떨지만 솜씨가 여간 아니다.

엽기에 질려 자기 이야기를 개인 홈페이지에 싣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책으로 엮게 됐다고. 출판사측 말로는 저자 얼굴도 못 봤다 한다. 마음이 맞는 홈페이지 방문객들과는 더러 오프라인 모임도 갖는다니 낯 가리는 필자도 희귀한 일이다. 소란스러웠던 여름이 지는 요즘, 거창한 광고카피도 없고 화려한 조명도 못 받았지만 아는 이들끼리 소근대며 찾는 일상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

jae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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