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몸속에 들어간 엄마의 영혼 아빠는 "헷갈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일본 영화 '비밀'을 보려면 일단 '빙의(憑依)'라는 말을 알아두면 좋다. 심령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빙의라는 개념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의 영혼이 서로 뒤바뀌는 현상을 뜻한다. '비밀'에서 혼이 뒤바뀌는 것은 엄마와 딸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엄마는 죽고 딸은 살아나지만 대신 어머니의 영혼이 딸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비밀'은 딸의 겉모습을 한 아내와 함께 살게 된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빙의 현상이 일어난 몇년 뒤 원상회복을 했다는 프랑스의 사례를 내비쳐 이 '기묘한 동거'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지만 영화는 비극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근친상간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선정적인 대목도 없다. 오히려 아빠와 딸이 겪는 난처한 상황을 밝고 코믹하게 그려간다.

헤이스케(고바야시 가오루)는 아내 나오코(기시모토 가요코)와 딸 모나미(히로스에 료코)가 탄 고속버스가 벼랑에서 굴렀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혼수상태에 빠진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넋을 잃은 그에게 별안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 나오코의 혼이 모나미의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때부터 이들은 바깥에서는 부녀로, 집안에서는 부부로 행세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디테일이 살아있다. 특히 머리로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아내임을 이해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렇지 못한 헤이스케의 심리를 잘 묘사한다. 그래서 일견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법한 설정임에도 드라마에 안정감이 실린다. 예를 들면 모나미는 아내답게 헤이스케의 '밤일'을 걱정해주지만 헤이스케는 등을 밀어주는 그녀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집안에서는 주부지만 학교를 다녀야 하는 모나미 때문에 빚어지는 둘 사이의 갈등도 비교적 아기자기하게 그려진다. 의대에 진학하고 요트부에 가입해 청춘을 마음껏 즐기는 모나미. 헤이스케는 이러한 딸의, 아니 아내의 젊음을 질투한다. 동시에 싱싱하게 피어나는 그녀의 젊음 앞에서 남자로서의 자신감이 점점 엷어지는 것을 실감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모나미의 몸 안에는 나오코와 모나미의 영혼이 공존하게 된다. 그녀의 하루가 아내의 시간과 딸의 시간으로 나뉘는 것이다. 모녀는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영화는 어느덧 세 식구의 '행복한 동거법'으로 막을 내리는 듯 싶다. 여기까지 본다면 '비밀'은 그럭저럭 무난한 코믹멜로물이라는 인상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숨어있는 이 영화의 진짜 '비밀'은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한 등급 상향조정하게 한다.

이 영화는 1998년 일본에서 발표돼 베스트셀러가 됐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레옹''제5원소'의 뤽 베송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즉시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이기도 했다. 10월 1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