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세계사 모르면서 세계화 외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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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청소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국제무대에서 한국인의 무식함과 매너 부족은 창피할 정도다.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고 학창 시절 배운 것은 ‘열린’ 민족주의가 아닌 폐쇄적인 국수주의 교육이니, 대화나 주장이 자칫 다른 이의 공감을 얻기 힘든 촌스러운 로컬리즘(localism: 자기가 속한 지역 중심주의, 편협성)으로 흐르는 것을 무수히 봐 왔다. 논의 주제가 뭔지도 모르니 아예 대화에 끼지도 못하거나, 가끔 알맹이 없이 ‘용감’한 이가 전혀 수준과 문맥에 맞지 않는 독백을 하니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날까? 외국어 실력 부족만이 이유가 아니다. 독서가 한참 부족하고 편향적이며, 신문(특히 국제면)을 잘 안 읽는 것도 큰 원인 중 하나다. 거기에 더 근본적인 문제로 세계사 교육의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학창 시절 그래도 세계사는 문과 필수였고, 이과생에게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교과서가 사건·연도·인명 나열인 경향이 있었고, 매우 두껍고 어려워 학생들의 기피 과목이었다. 게다가 대입시험에서 문제(15점 배점)가 어렵게 출제됐기에 “세계사는 너무 어려워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꼭 ‘세 개’는 틀리기에 ‘세개사’다”는 썰렁한 농담도 있었다. 이과생들은 쉽고 분량이 적은 다른 과목을 택했지 세계사를 택하지 않았다.

문과생에게도 선택과목이 되고 나선 세계사의 채택률은 처참한 수준이다. 7차 교육과정의 마지막으로 치러진 2004 수능에서 세계사 채택률은 처참한 수준인 3.4%(67만4000명 중 2만3000여 명)였다. 다른 제도하(사회탐구에서 2개 과목 이상 채택)에서 시행된 2010년 수능에서도 총응시자 63만8000명 가운데 세계사 선택자는 사회과 중 가장 적은 3만8000명(6%)이었다. 다른 사회과인 사회문화(28만 명)·한국지리(24만8000명)·한국근현대사와 비교하면 큰 차이다.

타 사회과목에 비해 분량을 두어 배로 만들고 어렵게 출제해 세계사를 기피 과목으로 만든 서양사·동양사 교수와 교사들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각종 시험에서 학부 시절 일부 둔재가 나중에 교수가 돼 출제하거나 불성실한 교수들이 내는 문제들이 배배 꼬인 경향이 있어 실소(失笑)를 머금은 적이 있다. 실제로 필자의 대학 시절 대입시험에 출제된 한 세계사 문제는 큰 논란을 야기했다. 전공 학생은 물론 교수도 헷갈릴 정도고 학문적으로도 이견의 소지가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를 안 배운 대학생들의 타 세계에 대한 이해는 다른 선진국 초등학생 수준이다. 명문대에서는 사정이 조금 낫지만 대체적으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당연히 알아야 할 기초지식도 모르니 어디서부터 가르쳐 할지 막막한 적이 많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외여행을 다녀왔어도 놀다 온 것만 기억하지 정작 얻어야 할 정보와 경험은 축적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청소년들이 오히려 세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 깜깜한 것은 이 시대의 역설이다.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 의한 ‘역사’ 교과서는 이런 문제를 부분적으로나마 타파하기 위해 근·현대사 부분의 한국과 관련된 항목에서 간소하나마 세계사 부분을 서술하기로 했다. 그런데 ‘2009 교육과정’에선 ‘역사’가 ‘한국사’ 과목으로 바뀌고 수정될 예정이라 세계사를 교육시키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시작하자마자 또는 시작도 못 하고 끝날 운명이라고 한다. 일각에선 국사 교육의 약화를 우려한다. 일리 있는 얘기다. 그러나 국사는 그동안 특혜라고 얘기할 만큼의 대우를 받아 왔다. 하지만 세계사 교육은 약화가 아니라 예전부터 말살 수준이었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세계화의 파고를 이겨 내고, 파도를 오히려 멋지게 탈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준비시켜야 한다. 아쉽게도 한국 교육은 이런 면에서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세계사 교육 없는 세계화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정부와 국민의 각성과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고교에서의 세계사 교육 제고 노력은 물론, 다소 늦은 나이지만 대학생에 대한 체계적인 세계사 교육 강화를 통해 이런 문제가 보완돼야 한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