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의 도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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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늘 평양에서 열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와 김정일(金正日)북한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은 그동안 외교가와 언론계에 많은 추측을 낳았다. 낙관론자들은 일본의 신중한 외교노선을 지적하며 일본이 정상회담을 수락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번 회담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이 북한으로부터 미리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약속받지 못했다면 회담이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비관론자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과도한 기대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당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회담 후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북한의 대립이 끝났다는 상징적인 몸짓으로 평양을 떠났지만 지금까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북한의 실질적인 양보는 없는 상태다.

이같은 기대와 혼란은 그동안 있었던 일본과 북한의 고위급 회동에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총리 시절인 1972년 일본 자민당의 북한 접촉과 80년대 중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총리의 밀사와 허담 북한 외교부장의 회담, 90년 가네마루 신(金丸信)자민당 부총재와 김일성(金日成)주석의 만남 등은 모두 높은 기대 속에서 북·일 관계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예견됐으나 결국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데 실패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의 성공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구체적 성과를 내는 데 실패했던 북·일 회담의 전례를 뒤집어야 할 뿐만 아니라 현재 시점이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의 방북은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남한에서 햇볕정책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다. 더욱이 고이즈미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강경파들이 햇볕정책의 성과에 대해 갈수록 불신하는 가운데 김정일을 만난다. 최근 남북 관계 개선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방북에 대한 부시 정부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이라크 공격을 위한 국제적 논의와 9·11 테러 1주년 기념식 등은 햇볕정책에 반대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보고 있는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미국과 북한의 화해를 위한 가교역할을 요청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최근 워싱턴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고이즈미가 성공적인 회담을 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만약 고이즈미가 조총련 관련 단체의 대북(對北)송금 제한을 푸는 대신 북한에 억류된 일본인 납치 문제를 해결한다면 서울에서야 환영을 받겠지만 워싱턴의 기대에는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고이즈미는 더 나아가야 한다.▶2003년 종료 예정인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 동결 조치를 연장하고▶북한 핵시설에 대한 국제적 사찰을 수용하는 등 기존 미·북간 합의사항을 더욱 빨리 이행하도록 김정일을 설득해야 한다. 노동 미사일 배치와 관련해 북한이 자발적인 신뢰 구축 조치를 취하도록 할 필요도 있다. 마지막 항목은 북한이 2000년 말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성사 가능성이 작은 것이다. 그러나 앞의 두 항목은 가능성이 큰 것이다.

미사일 발사 실험 동결이나 핵사찰에 대한 북한의 양보는 워싱턴의 부시 행정부내 강경파들의 냉소주의와 맞닥뜨릴 수 있지만 서울의 햇볕정책 지지자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면 부시 행정부내 강경파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까. 솔직히 북한 정권의 완벽한 몰락만이 그들을 만족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고이즈미의 방북은 부시 행정부내 강경파들에게 햇볕정책의 이점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북아에서 햇볕정책이 최선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 그래야 무력 대응을 원하는 강경론자들이 대북 정책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고이즈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정일이 북·일 정상회담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잘 살리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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