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보는 세상] 班門弄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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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에 어울릴 만한 한자 성어는 무얼까. ‘반문농부(班門弄斧)’가 아닐까 싶다. 반(班, 사람 이름)의 문(門) 앞에서 도끼(斧)를 희롱한다(弄)는 뜻이다. 춘추시대에 성은 공수(公輸)요, 이름은 반(般)이란 이가 있었다. 반(般)은 당시 음이 같은 반(班)과 통용됐다. 그는 노(魯)나라 사람이라 흔히 노반(魯班)으로 불렸다. 손재주가 워낙 뛰어나 도끼를 귀신처럼 부리고 대패를 춤추듯이 놀렸다. 어떤 목재든 그의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명품으로 둔갑하곤 했다.

하루는 손도끼를 든 젊은이가 나타났다. 못 만드는 게 없다며 뻥을 쳤다. 이에 사람들이 어떤 집의 멋진 문을 가리키며 당신도 저런 문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노반의 제자인데 이 따위는 식은 죽 먹기”라며 허풍을 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당신은 어째 노반의 제자라면서 노반의 문도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비웃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가 줄행랑을 친 건 불문가지다.

당(唐)대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이 고사를 두고 ‘노반과 영(郢, 초나라의 유명 장인)의 문전에서 도끼를 잡다니 얼굴도 참 두껍다(操斧于班·郢之門 斯强顔耳)’고 했다. 명(明)대 시인 매지환(梅之渙)은 채석기(采石磯)에 있는 이백(李白)의 무덤에 들렀다가 뭇 문인들이 그곳에 적지 않은 시를 남겼음을 발견했다. 시선(詩仙) 이백 앞에서 시재(詩才)를 뽐내기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에 그는 ‘제이백묘(題李白墓)’란 시 한 수를 지었다. ‘채석 강변의 한 무더기 흙이여(采石江邊一堆土) 이백의 이름 천고에 드높구나(李白之名高千古) 오가는 이마다 시 한 수 남기니(來來往往一首詩) 노반 문 앞에서 도끼 희롱하기구나(魯班門前弄大斧).’

반문농부는 관우 앞에서 큰 칼 휘두르기(關公面前耍大刀), 공자 앞에서 문자 쓰기와 다름없다. 알량한 제 실력 믿고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충고다. 스스로 핵실험 두 번 했다고 우기는 북한이 한국은 차치하고 이젠 세계 최강의 핵 대국 미국을 상대로 핵 협박도 서슴지 않고 있다. 25일 시작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겨냥해 ‘핵 억제력에 기초한 보복 성전’을 거론하고 있다. 반문농부의 만용(蠻勇)이 심히 걱정스럽다. 북한은 언제 철이 들려나.

유상철 중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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