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대기업과 중소기업, 진짜 상생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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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기업이 고개를 들 상황이 아니다.”(5대 그룹 한 임원)

청와대의 ‘대기업 독식’ 비판에 대한 반응이다. 대기업은 한껏 몸을 낮췄고, 중소기업은 기대에 부풀었다. 일부 대기업은 비상회의를 소집해 협력회사와의 상생 확대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속내를 좀 더 들여다보면 사정이 달랐다. 대기업은 불만이 가득했다. 5대 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은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들이 죽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망한 회사가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20여 년 전 입사했을 때는 이런 곳에서 대기업에 납품할 물건을 어떻게 만드나 싶을 정도로 영세한 협력업체가 많았지만, 지금은 번듯하게 성장한 곳이 상당수”라는 주장도 했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은 “외국 대기업은 ‘협력업체’라는 개념조차 없는 곳이 많다”며 “그들은 세계 업체를 대상으로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골라 사들이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의 이런 주장이 다 옳다는 건 아니다. 대기업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내고 있지만, 중소기업·서민의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한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 내부에서도 “그간 1차 협력업체 정도만 들여다봤지 2, 3차 협력업체의 사정은 솔직히 별 관심을 안 가졌다”(한 5대 그룹 관계자)는 반성이 나온다.

하지만 대·중소기업 상생이 무조건 대기업 이익을 줄여 중소기업에 주는 식이 된다면 그건 곤란하다. 한국 대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밀리면 이들에게 납품하는 업체도 함께 어려워진다. 한 대기업 임원은 “대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 사회 전체로 흘러 들어가게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인정했다. 다만 “대기업 이익을 줄이는 방식보다는 중소기업이 우수 인재를 뽑고, 기술력을 키울 수 있도록 ‘상생 펀드’ 등을 만들어 지원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국내 유명 정보기술(IT) 업체에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A사는 지난 10년간 연간 18~25%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이 회사 대표는 “기술·품질에 자신이 있다면 대기업에도 얼마든지 큰소리를 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대기업의 중소기업 지원이 어떤 방식이 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김선하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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