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인정하자는 것이 내 그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2001년 9월 11일, 뉴욕 사태가 벌어진 다음 더더욱 정신이 차려지지 않는다… 세상은 이성의 장치가 파괴되어 동물화로 치달아 아수라장인데, 표현이나 말이 가능한가."

화가 이우환(66·일본 다마미술대학 교수)씨는 자신의 예술론이라 할 '여백의 예술' 한국어판(김춘미 옮김·현대문학 펴냄) 서문을 이런 고통스런 질문으로 시작했다.

"'예술'이 파산한 시대…'인간'이 퇴장한 오늘날 무슨 말로 누구에게 글을 쓴다는 것일까."

그 답을 듣고 싶어 마침 책 출간에 맞춰 서울에 온 이씨를 만났다. 해마다 여덟달은 유럽에서, 나머지 넉달은 일본에 머물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9·11 사태는 이미 내 안에서 훨씬 이전부터 일어나서 뉴욕에서 외화하여 확인된 느낌"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텔레비전으로 '저게 무슨 영화지, 영상이 자극적인데'라고 놀라며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다 그게 실제상황이란 걸 알자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현실을 뛰어넘어야 할 예술가가 오히려 상상력에서 밀렸다는 자괴감이랄까. 어쨌든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예감했던 일이 일어났고, 그게 끝이 아니고 시작이란 걸 말하고 싶어요. 미국 또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종이자, 거기서 창궐했던 문화에 대한 경고랄까. 남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건 이제 물러가야죠. '남을 인정하는 예술'을 하라는 것이 바로 내 그림입니다."

그는 "1백% 자기 생각으로 캔버스를 몽땅 덮어버리는 것이 근대미술이었다"며 "20세기와 함께 그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미술은 효력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유럽으로 경계를 넘나들면서 나는 자기 생각을 줄이고 남을 끌어들이며 서로 관계하는 그림을 얘기했어요. '만남을 찾아서'라든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이란 내 이론은 거기서 나왔지요. 그림이 딱 가운데 서서 모든 걸 가로막으면 안돼죠. 조금 비껴 서서 누구나 자기 눈으로 볼 수 있게, 그게 예술입니다."

"점 하나를 찍는 최소한의 작업으로 최대한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다"는 그는 "그러다가 그 점 하나마저 사라지면 어쩔 거냐"는 걱정에 "나를 내세우지 않고 침묵으로 더 큰 얘기를 하는 그림, 텅 빈 캔버스라도 보는 이에게 묘한 느낌과 울림을 준다면 그게 또다른 시작"이라고 웃었다.

책 제목인 '여백의 예술'은 이렇게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를 얘기한 글 모음이다.

1967년부터 최근까지 일본과 유럽의 잡지·신문·도록에 실렸던 이 단상들은 '끊임없이 외부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자기를 대하고 표현의 성립과 기원을' 물었던 작가의 30년 세월을 요약한다.

이우환씨는 내년 가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 회고전에서 "'한국적'이라는 걸 배경처럼 달고 다녀야 안심하는 사람들에게 그걸 벗어나야 자기것을 살찌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국제전 참가를 위해 호주로 떠났다.

정재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