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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계 갈등 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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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92년 여름. 서울 인사동 '현대시학' 편집실에 정진규 주간과 이승훈 시인이 앉아 계셨다. 두 분은 글쓰기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젊은이를 가엾다는 듯 굽어보았다. 즉시 처방이 나왔다. 정 주간은 "처음으로 돌아가 되짚어 보라"고 권했다. 재정이 어려운 시 전문지를 떠맡아 고단할 무렵. 그래도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넘쳤다. 이 시인이 말을 끊었다. "아니지, 그건 퇴보지. 지금 위치에서 길을 찾아야지." 이 시인의 눈빛은 싸늘했지만 등을 다독이는 손은 따뜻했다.

당시 대가들 앞에서 잔뜩 주눅 든 젊은이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다. 느닷없이 13년 전 얘기를 끄집어내는 건 최근의 프로농구.프로축구 현장의 상황 때문이다. 그곳에선 지금 '원칙'과 '상황'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부딪치고 있다.

#삽화 1

어느 스포츠 행사장에서 한국농구연맹(KBL) 관계자를 만났다. 그는 "외국인 선수 선발도 그렇고, 대학선수 선발도 그렇고 무질서와 편법이 난무한다"고 개탄했다. 괜찮은 선수를 놓고 여러 구단이 지나치게 경쟁해 몸값을 올려놓고, 뒷돈을 주고 계약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는 "외국의 경우는 어떠냐"고 물었다. 미국 농구를 표본 삼아 운영하는 몇몇 유럽 국가의 경우를 간단히 설명하면서 "원칙대로 할 뿐 잘 어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원칙은 스포츠로 치면 '기본기'다.

#삽화 2

지난 연말 축구계에 두 개의 '재야 단체'가 결성됐다. 축구지도자협의회와 축구발전연구소다. 두 단체는 "지금 한국 축구는 위기"라고 규정했다. "정몽준 회장이 대표팀 중심으로 협회를 운영했고, 그래서 프로를 비롯한 국내 축구가 황폐해졌다"면서 18일 축구협회장 선거에 축구인 출신의 후보를 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지도자협의회는 지난 4일 세 가지 공개질의서를 발표하고 협회가 '성의있게' 답변하면 후보를 내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날엔 "정 회장을 공격하려는 뜻은 없다"고 했다. '다른 길'을 발견한 것일까?

#사족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는 방법은 두 가지다. 떠나온 곳으로 되짚어가 다시 출발하기, 아니면 길을 잃은 그곳에서 가고자 하는 곳으로의 지름길을 찾는 것이다.

프로농구의 문제는 원칙을 안 지켜 생긴 문제다. 출범 당시 KBL은 외국인 선수를 수입하면서 각 팀이 장신.단신 한 명씩을 보유하도록 규정했다. 골밑의 두 자리 중 한 자리, 외곽의 세 자리 중 두 자리는 국내 선수에게 보장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골밑에서 활약하는 단신의 외국인 선수가 등장하면서 이 규정은 무의미해졌다.

지금은 두 선수 신장을 합계 4m, 연봉을 합계 28만달러(약 2억9400만원)로 제한한다. 편법이 필요할 만큼 지키기 어려운 규정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라는 틀보다는 내 구단의 승리만을 생각하기에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다.

축구계의 분열은 한국 축구의 발전이라는 큰 길을 찾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축구협회 역시 "대표팀이 독일월드컵에 못 나가면 한국 축구 전체가 시든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재야와 협회 모두 '한국 축구의 몰락'을 두려워하는 공통분모를 가진 셈이다.

그런데도 재야 쪽은 "정 회장하고만 대화하겠다"고 하고, 협회는 재야의 목소리를 고깝게 여긴다. 진정으로 한국 축구를 걱정한다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머리를 맞대는 것만으로도 '길 찾기'는 가능할 텐데 말이다. '원칙'과 '상황'을 조화롭게 충족시킬 각자의 애정과 지혜가 아쉽다.

허진석 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