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日 수교 교섭 90년후 번번이 결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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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8·15 해방 후 줄곧 적대관계였던 북한과 일본 간의 수교 교섭 물꼬를 튼 사람은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였던 가네마루 신(金丸信·1996년 사망)전 자민당 부총재였다.

그는 1990년 9월 자민·사회당 의원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에 가 "국교 정상화를 위한 정부 간 교섭을 개시한다"고 전격 합의했다.

가네마루는 이때 김일성(金日成)주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등 저자세를 보였다고 해서 일본 극우파로부터 권총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첫 수교 회담은 91년 1월 평양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배상 문제부터 양국의 시각차는 매우 컸다.

결국 92년 11월의 8차 수교 회담을 끝으로 회담은 결렬됐다.

일본 측이 "대한항공기 납치범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로 알려진 이은혜(李恩惠)는 북한 측이 납치한 일본인이라는 의혹이 있다"며 진상조사를 요구하자 북한 측이 반발,회담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은 이후 일본 측이 쌀을 북한에 지원하고 북·일 적십자 회담(97년 9월)을 하는 등 회담 재개 분위기를 꾸준히 조성했다. 97년 11월에는 모리 요시로(森喜朗)자민당 총무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의원 대표단이, 99년 12월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전 총리가 이끄는 초당파 의원단이 잇따라 방북하는 등 정치권도 수교 회담 재개를 도왔다.

9차 수교 회담은 7년5개월 만인 2000년 4월에 열렸다. 양측 대표단은 이해 10월의 11차 회담까지 세차례 만났지만 과거 청산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재차 결렬됐다.

최근의 관계 급진전은 지난달 브루나이에서 열린 백남순(白南淳)북한 외무상·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일본 외상 간 회담이 계기가 됐다.

이후 북·일 적십자 회담·국장급 회담이 이어졌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이 발표됐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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