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한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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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2면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10가지 발명품을 말해주겠어."스코틀랜드 여행 중 글래스고에서 만난 친구가 말했다. "텔레비전, 스카치 위스키, 전화, 증기 기관, 콜타르,페니실린, 골프, 복제양 돌리, 퀼트, 그리고 숀 코너리…."

영화배우 숀 코너리를 열거한 건 그의 위트였지만, 스카치 위스키에 관한 자부심은 넘치다 못해 국솥 밖으로 흘러내릴 만큼이었다. 눈 닿는 모든 곳이 은화처럼 예쁜 스코틀랜드의 자연도 그의 자부심을 보탰다.산업혁명을 일으킨 나라가 어쩌면 그렇게 자연을 잘 '보관'해 왔는지, 그림 엽서가 우스운 풍경 앞에서 나는 시적(詩的)인 질투에 괴로웠다.

우리는 시침과 분침으로 구획된 같은 시간의 경계를 넘어온 게 아니었다. 싱싱한 12년산 위스키부터 아주 온화해진 질감의 50년산 위스키를 맛보는 동안 나는 그들이 기록 보관소에서 시간을 꺼내온다고 생각했다. 50년 전에 위스키를 담근 사람이, 생전에 그 위스키를 맛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시간이 비스듬하게 기울어 그들은 두 배의 인생을 사는 걸까?

나는 늙기 전에 뭔가 승부를 봐야 하고,뭐든지 잽싸야 안팎으로 칭찬받고, 도로 사정은 웃기는데 속도만 강조하는 자동차 광고가 범람하는 나라에서 보조를 맞춰 사느라 이렇게 기진맥진했는데….

부러웠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딱 그런 거였다. 가슴 속에서 늘 싹이 트던 청산(靑山)에 살고 싶다던 꿈이 추상은 아니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한국에서 '인간 대접'못받고 살아왔던 세월들이 지글지글 치욕스럽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걸 돈으로 환산해 돌려받고 싶은 이상한 보상심리로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체류 기간이 늘어나자 천공으로 치솟던 감정들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필설(筆舌)이 부족한 목가적 풍경,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평화로움 속엔 뭔가 빠져 있었다. 그건 매일 생선매운탕을 고춧가루가 안 섞인 '지리'로 먹는 것과 같았다. 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무모한 투쟁의 날들, 마음을 춥게 만드는 무례, 매일 참회를 요구하는 졸렬한 밤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게 차라리 더 인간답다는, 포기된 듯한 허세도 밀려왔다.

세상을 살아가는 1백만개의 방법 가운데, 나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한국적 삶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천국에서 탈출한 듯한 이상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리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그것과 바꾸려 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충걸 『GQ KOREA』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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