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베니스 영화제서 뜨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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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앗, 형님이 먼저 오셨네요. 많이 기다리셨죠?"

약속 장소로 정한 서울 청담동의 한 식당에 들어선 조인성(21)이 10분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장혁(26)을 보며 반색한다. 같은 기획사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두 사람은 사석에서 호형호제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다섯살 위인 장혁에게 어찌 보면 고리타분하게도 들리는 '형님'이라는 호칭을 꼬박꼬박 붙이는 '아우' 조인성의 첫 인상은 딱 '진중한 청년'이다. 그 아우를 바라보는 형님의 검정 선글라스 낀 눈길이 정답기 그지 없다.

29일 개막하는 제5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를 며칠 앞두고 두 사람이 바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어렵사리 만났다. 그들에게 요즘 '베니스'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무명에 가깝던 2년 전, 홍콩 감독 프루트 챈의 제안으로 찍은 영화 '화장실, 어디에요?'(제작 디지털네가)가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정보다 완성이 늦어져 언제가 될 지 기약없던 개봉도 영화제 출품 뒤 10월로 확정됐다. 그러니 베니스에서 공식 시사회가 열리는 31일이 이들의 표현처럼 "내 생애 꼭 하루뿐일 아주 특별한 날"일 수밖에.

프루트 챈은 영국으로 반환되기 직전의 홍콩 젊은이를 그린 데뷔작 '메이드 인 홍콩'으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3개 부문을 석권하며 세계적 스타로 떠오른 감독이다.

해마다 빠짐 없이 한편씩 발표하는 다작 감독으로도 유명한 그의 '화장실, 어디에요?'는 화장실을 인간의 생로병사의 축약판으로 보고, 이를 매개로 뉴욕·베이징·부산 젊은이들의 사랑과 절망을 그려나간 팬터지다.

여기서 장혁은 부산 바닷가에서 횟집을 하는 청년 김선박을, 조인성은 김선박의 단짝 친구이자 불치병을 앓고 있는 조를 연기한다.

"현장에 나가서야 비로소 대본을 받았고 내용도 즉흥적으로 바뀌는, 저로선 참 신기한 경험의 연속이었어요. 촬영도 일주일 만에 다 하겠다고 그러고…." '참 별난 경험'이었음을 강조하는 장혁. 더 경험이 없던 조인성은 더했다. "조명도 꼬마 전구 달랑 하나였어요. 말도 안 통하니 의사소통도 손짓 발짓으로 했구요. 감독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죠."

조인성은 촬영 중 큰 사고도 당했다. 삼륜 트럭을 몰고 언덕을 내려가는 장면이었는데 브레이크 조작 미숙으로 그만 트럭째 구르고 만 것. 천만다행으로 다리가 부러지는 선에서 그쳤다. 장혁은 이 대목에서 "다친 다리도 아랑곳 없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인성이가 정말 괜찮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인성이 응수한다. "형, 형이 혁재형(개그맨 이혁재) 결혼식 때 화장실에서 그랬잖아. '우리가 열정 하나 빼면 뭐가 남겠느냐'고. 형 말대로 늘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고 다짐하죠."

2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현재의 저희 연기력이 주먹만 하다면 당시는 손가락 한 마디나 됐을까요. 하지만 그 한마디 안에서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어요. 세계적인 감독·스태프와 일하고, 또 그 결과물인 베니스라는 공인된 국제 무대에 설 기회가 제 인생에 과연 몇번이나 있을까요? "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아쉽지만 두 사람은 영화제에 참석하진 못한다. 장혁은 10월께 방영되는 '모래시계' 김종학 PD의 시대극 '대망' 때문에, 조인성은 연말 개봉될 멜로영화 '마들렌' 때문이다. 조인성도 '대망' 1회분에 잠깐 얼굴을 비춘다. "인성이가 캐스팅된 건 첫회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단숨에 휘어잡을 만한 배우이기 때문 "이라는 형님의 칭찬에 아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의바른 태도 속에 숨어있는 뜨거운 열정이 보기 좋았던 두 배우들과의 만남은 어느새 2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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