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꽃뱀 화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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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고진하(1953~ ), 「꽃뱀 화석」부분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그런데, 오늘, 숲으로 막 꺾어들기 직전

구불구불한 길 위에

꽃무늬 살가죽이 툭, 터진

꽃뱀 한 마리 길게 늘어붙어 있다.

(오늘은 꽃뱀부터 읽어야겠군!)

쫙 깔린 등과 꼬리에는

타이어 문양,

불꽃 같은 혓바닥이 쬐금 밀려나와 있는 머리는

해 뜨는 동쪽을 베고 누워 있다.

뭘 보려는 것일까,

차마 다 감지 못한 까만 실눈을 보여주고 있는

꽃뱀.

온몸을 땅에 찰싹 붙이고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녀

대지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거라고 믿어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신(神)으로 숭배했단다.

눈먼

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

사신(蛇神),

사신이여,

이제 그대가 갈 곳은

그대의 어미 대지 밖에 없겠다.

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

숲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

여한도 없겠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부서진 사체는 화석처럼 굳어지며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산책, 오늘 내가 읽은

산이라는 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소지(燒紙)로 화한 셈이다.

햇살에 인화되어 피어오르는

소지 속으로,

뱀눈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책을 읽는 일, 즉 활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연과 삶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의 산책에서 시인이 읽은 것은 타이어에 깔려 죽은 한 마리 꽃뱀의 몸. 평생 땅을 기며 살다가 땅으로 돌아간 한 생명의 풍화. 풍화된 먼지 속으로 날아가는 한 마리 <뱀눈나비>.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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