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1953~ ), 「꽃뱀 화석」부분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다.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높은 머리에 이슬과 안개와 구름의 관(冠)을 쓰는
색다른 독서 경험이다.
그런데, 오늘, 숲으로 막 꺾어들기 직전
구불구불한 길 위에
꽃무늬 살가죽이 툭, 터진
꽃뱀 한 마리 길게 늘어붙어 있다.
(오늘은 꽃뱀부터 읽어야겠군!)
쫙 깔린 등과 꼬리에는
타이어 문양,
불꽃 같은 혓바닥이 쬐금 밀려나와 있는 머리는
해 뜨는 동쪽을 베고 누워 있다.
뭘 보려는 것일까,
차마 다 감지 못한 까만 실눈을 보여주고 있는
꽃뱀.
온몸을 땅에 찰싹 붙이고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녀
대지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알거라고 믿어
아프리카 어느 종족은 신(神)으로 숭배했단다.
눈먼
사나운 문명의 바퀴들이 으깨어버린
사신(蛇神),
사신이여,
이제 그대가 갈 곳은
그대의 어미 대지 밖에 없겠다.
대지의 속삭임을 미리 엿들어
숲속 어디 은밀한 데 알을 까놓았으면
여한도 없겠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부서진 사체는 화석처럼 굳어지며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산책, 오늘 내가 읽은
산이라는 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소지(燒紙)로 화한 셈이다.
햇살에 인화되어 피어오르는
소지 속으로,
뱀눈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산책은 <산이라는 책을 읽는 일>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책을 읽는 일, 즉 활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연과 삶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의 산책에서 시인이 읽은 것은 타이어에 깔려 죽은 한 마리 꽃뱀의 몸. 평생 땅을 기며 살다가 땅으로 돌아간 한 생명의 풍화. 풍화된 먼지 속으로 날아가는 한 마리 <뱀눈나비>.뱀눈나비>산이라는>
김기택<시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