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의 김정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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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을 취재했던 한국과 러시아·일본 기자들은 내내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비록 북한 기자 16명과 러시아 기자 4명에게만 직접취재가 허용됐지만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낱낱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러시아 매체들은 金위원장의 동선(動線)을 시간마다 다양하게 인터넷에 올렸고, TV는 구석구석 카메라를 들이대 전파에 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오찬 때 金위원장이 음식에는 손을 안대고 포도주나 보드카만 마셨으며 메뉴로 개구리 뒷다리 요리가 나왔다는 뉴스는 얼마나 시시콜콜한 면까지 공개됐는지 보여준다. 지난해 중국과 러시아 방문 때와 사뭇 달라진 '자유분방한' 보도에 그가 손사래를 쳤다면 이런 뉴스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극동지역 도착 첫날 "러시아 국민에게 불편을 끼쳐 미안하다"고 말했다. 무기공장에서는 60대 나이를 아랑곳 않고 철제계단을 뛰어오르며 열정적으로 시찰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러시아 정교회 교회를 예고없이 방문했다. 이런 행동은 그가 겸손하고 부지런하며 개방적인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면도 있다.

지난해 중국과 러시아 방문의 화두였던 '개혁'은 이번에도 金위원장이 탄 특별열차 꼬리에 매달려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시장경제 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찾은 쇼핑센터에서 "이윤이 얼마냐" "러시아제 물건이 많으냐"고 물었지만 실무자급에서나 나올 질문들이지 원대한 개혁구상에 전념하는 지도자의 품격을 드러내기엔 미흡한 질문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급속한 개혁의 실체를 보러왔다면서 느릿느릿한 열차 여행에 매달리는 데 대해 '광통신 시대의 시대착오'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북한의 운명을 거머쥔 金위원장이 아직도 '개혁의 미궁'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그가 고민하는 시간만큼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의 공사판에서 초췌한 모습의 북한 노동자들이 먼지 속에 기침을 하면서 싼값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시간은 늘어날 것이다.金위원장이 하루빨리 개혁구상에 종지부를 찍고 본격 실천에 나서길 기대해 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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