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견제하는 세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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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세계 도처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힘이 너무 커진데 대한 반발인 것 같다.

오늘날 미국은 세계 최강국일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했던 어느 제국보다도 힘의 격차가 큰 지구적 제국이다. 미국의 군사예산은 다음 20개 나라의 군사 예산을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많다. 그리고 미국의 첨단기술 연구 개발 예산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6개국의 연구개발 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3배 이상이 된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세계 최강의 위치를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제국들과는 달리 지구 어디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의 여유가 있다. 사실 과거의 제국들은 부분적으로만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었다.

영국은 19세기 전성기에도 해군만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고 지상군은 프랑스나 러시아 보다 작은 편이었다. 냉전시기에는 미국이 하늘과 바다를 지배했으나, 소련은 막강한 지상군으로 서방을 압박했고 전략적 핵 능력에서도 미국에 적지 않은 도전을 해왔다.

그런데 바로 미국에 도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초강대국 소련이 붕괴됨으로써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는 인식 때문에 미국은 오만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패권국가는 다른 강대국들의 연합에 의해 견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앞으로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국가로는 흔히 중국을 거론한다. 현재와 같은 성장속도를 유지하면 25년 후에는 중국 경제가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중국은 기술 개발 면에서 뒤떨어질 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근대화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기타 강대국들과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차이는 미국은 지리적으로 기타 강대국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데 반해 기타 강대국들은 인접해 있는 국가들이 있기 때문에 미국 이외의 강대국들은 군사력의 증강을 추구하는 경우 반드시 위협을 느끼는 강대국이 있게 마련이므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대국들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을 시도하는 경우 미국을 견제하기 전에 인접하고 있는 강대국과 대결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게 되고 20세기 후반에는 동아시아에 개입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이다.

그러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없는 것인가?

미국이 세계의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한 비록 군사력의 균형 면에서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없지만, 국제사회의 여론과 정치·외교적 리더십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미국 국민 자신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는 순간부터 이라크의 후세인을 제거하겠다고 하면서 이라크에 대한 군사 공격을 공공연하게 거론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공화당 중진들과 키신저를 위시한 전직 관료, 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아직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공격을 감행할지 안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부시 대통령도 그 엄청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미국이 과거의 패권국가와 다른 점이다. 과거의 패권국가들은 다른 강대국들의 견제를 받은 반면 국내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던데 반해 미국은 지금 대외적으로는 과거 어느 패권국가 보다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나라 안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자국 국민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결국에는 민주적인 헌정체제야말로 평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아닌가 한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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