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委 신뢰성 도마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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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시장에 등장했던 제품이 어느 틈에 신제품에 자리를 내주고 소리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 일상화된 세상이다. 기업간의 경쟁에서 오늘의 승자가 내일도 승자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사로잡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소설가 김진명의 최신작 『바이 코리아』는 기업 간의 경쟁을 한 국가 내에서의 경쟁관계로만 보아서는 21세기 패권적 기술경쟁의 거센 파고를 헤쳐갈 수 없음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도도한 시류를 반영하는 한 작가의 이러한 현실인식을 한국의 경쟁정책당국자들은 공유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지난달 말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LG·SK·현대자동차·현대·현대중공업 등 6개 그룹 80개 계열사 간의 내부거래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서면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공정위는 12대 대기업집단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결합재무제표 발표 결과 이들 기업집단간의 내부거래가 크게 줄지 않고 있는 것을 조사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공정위의 이번 조사는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오고 있다. 내부거래가 부당거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범죄행위인 것처럼 다루는 듯한 의식과 행태가 무엇보다 문제로 지적된다. 2001년도 결합재무제표 발표 결과에 따르면 기업집단의 내부거래 비중은 삼성·LG·SK·현대차 등 4대 기업집단의 경우 2000년 39.5%에서 2001년에는 오히려 37.6%로 감소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2대 기업집단 전체로는 동기간 중 35.3%에서 32.5로 감소하고 있다. 따라서 내부거래가 크게 줄지 않아 부당내부거래 조사가 필요하다는 공정위의 주장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내부거래의 비중이 하락해야 하는지 하는 의문과 내부거래 비중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 부당거래 때문이라는 입증되지 않은 인과관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사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 그룹 내부의 기업으로부터 구입할 것인가, 아니면 외부 시장에서 살 것인가의 문제는 경제학에서 오래 전부터 심각하게 연구돼 오고 있는 분야다. 일찍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코즈는 여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 놓은 바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는 선택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금융감독원조차 결합재무제표상의 내부거래가 곧 부당내부거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결합재무제표 발표를 계기로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하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다. 문제의 요체는 공정위가 아무리 정밀렌즈를 가져다 댄다 하더라도 한국의 4대 기업집단의 내부거래 비중은 앞으로도 여전히 공정위의 눈에는 절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업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집단의 주력업종은 전자·자동차 등 원료에서부터 중간투입물·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생산공정의 수직적 계열화의 긍정적 효과가 큰 분야로 구성돼 있다. 전자·자동차 등은 글로벌 경쟁이 이뤄지는 산업이다.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것과 거리가 먼 선택은 인수·합병의 좋은 사냥감이 되고 당장 그 기업 경영진의 퇴진을 재촉하게 되는 마당에 어느 정상적인 경영진이 시장의 논리를 무시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금번 공정위 조사 결정의 또 다른 심각성은 그것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부당내부거래의 혐의 사실을 포착하지 않고 전체 계열사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투망식의 조사방식은 부당한 법 적용의 소지가 농후하며 기업활동에도 막대한 차질을 초래한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부당내부거래는 경쟁제한의 우려가 있는 경우 해당 기업에 한해서만 조사하도록 규정돼 있으므로 자의적인 조사는 위법의 소지가 크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기업을 잠재적인 범죄집단으로 취급하는 이러한 방식의 자의적인 투망식 조사는 기업의 대외 신인도를 저하시키고 기업가정신을 훼손하는 등 장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비용을 발생시켜 기업의 활력으로 뻗어나가는 시장경제를 위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우려가 높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일각에서는 공정위의 이번 조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고 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조직은 영원하다 했던가. 정권은 가고 오지만 한번 훼손된 공정위의 신뢰성은 계속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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