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사업'주선' 고바야시 게이지 <아사히 신문 前 서울지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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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북한과의 사업은 중역회의나 이사회에서 결정하겠다는 식으로 해선 절대 될 일이 아니었다. 금강산 관광은 현대처럼 완전히 1인 지배 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을 막후에서 주선한 고바야시 게이지(67)교수가 현대의 대북사업 비사(?史)를 털어놓았다. 일본 후쿠오카의 규슈 국제대학에서 만난 고바야시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해냈다.

-어떻게 금강산 사업을 주선하게 됐나.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장 시절 鄭명예회장을 세차례 만났다. 그때마다 鄭명예회장은 금강산을 자랑하고, 번 돈을 고향을 위해 쓰겠다고 했다.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이산가족 1세대가 살아있는 동안 고향 땅을 밟도록 하자는 현대 측의 의도도 좋았다. 사업이 실현되면 점차 방북 대상이 넓혀져 보통사람들의 교류가 시작되리라고 봤다. 게다가 남북 문제는 일본에도 중요한 문제다. 왕래와 교류가 지속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북한의 반응은 어땠나.

"1997년 10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사인이 담긴 현대측의 위임장과 함께 김용순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수개월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알아보니 직접 이익이 되는 일도 아니고, 나와 김용순 비서의 관계도 몰랐던 때문인지 중간간부가 편지를 책상서랍 안에 그냥 넣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편지가 김비서에게 전달된 뒤엔 곧 '교섭을 해보자'는 반응이 왔다."

-사업 추진은 순조로웠나.

"고비 때마다 鄭명예회장의 기지와 결단이 먹혀들었다. 교섭 초기 북측이 전제조건으로 쌀 1백만t 원조를 요구하자, 鄭명예회장이 옥수수 5만t 지원을 내걸어 협상을 진척시켰다. 또 판문점을 통한 육로 방북에 대한 북한 군부의 반대를 '소떼 방북'으로 물리쳤다. 교섭과정에서 잘 알고 지내던 강인덕 통일부장관에게 가끔 전화해 진척 상황을 얘기하며 조언을 구했다."

-현대의 대북사업이 남북 정상회담에 기여했다고 보나.

"나는 남쪽의 박지원과 북쪽의 송호경을 만나도록 주선한 것은 정몽헌과 이익치라고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DJ의 평양 방문은 완전히 현대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쿠오카=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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