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두터움 찌르는 이세돌 빠른 창 '속력행마 시대'다시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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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스피드냐 두터움이냐.

바둑의 영원한 숙제요, 양립할 수 없는 두가지 요소인 스피드와 두터움의 우열 싸움이 이창호-이세돌의 왕위전 대결에서 재현되고 있다.이창호9단은 느리지만 두텁다. 이세돌3단은 빠른 대신 엷다.수천년을 싸워온 두터움과 스피드의 대결. 과연 이번의 승자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두터움은 계산적이고 스피드는 감각적이다. 두터움은 미래를 내다보고 스피드는 현실을 중시한다. 이창호의 두터움이 꿰뚫기 힘든 방패라면 이세돌의 스피드는 날카로운 창이다.

한국바둑의 일인자 계보는 조남철9단에서 김인9단 - 조훈현9단 - 이창호9단으로 이어져왔다. 스피드 계열의 조남철9단은 두텁고 중후한 기풍의 김인9단에게 무너졌고 김인9단은 조훈현9단의 '속력행마'에 꺾였다. 조9단은 누구도 따라잡기 어려운 눈부신 속도를 지닌 사람. 그는 이 스피드 하나로 김인9단의 아성을 허물었다.

이창호9단은 느렸다. 조훈현의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 이창호의 무심한 두터움은 마치 세상의 실리에 초연한 듯 보였다. 하나 이창호의 두터움은 조훈현의 속력행마를 쓰러뜨렸다. 조훈현의 번득이는 감각이 이창호의 느릿한 계산에 무너졌다. 이9단은 훗날 두터움과 스피드를 한데 묶어보고자 무진 애를 썼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두터움의 계열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세돌3단이 나타났다. 그는 조훈현9단과 매우 흡사하다. 빠른 발걸음에 번득이는 감각, 허를 찌르는 임기응변, 그리고 자신의 엷음을 보완하는 발군의 전투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 둘이 맞붙은 왕위전은 물론 교본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두 기사가 서로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한 데다 이창호9단이 일인자의 자존심으로 자신의 특기인 계산바둑 대신 이세돌의 특기인 전투로 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이세돌의 창과 이창호의 방패가 일진일퇴하고 있다. 1국에선 혈전 끝에 이창호의 대마가 죽었고 2국에선 이세돌의 대마가 죽었다. 3국은 이세돌의 공격 실패였고 4국은 이세돌의 공격 성공. 한달여에 걸친 2승2패의 치열한 공방 속에서 승부는 마지막 5국으로 미뤄졌다.

조남철(스피드)-김인(두터움)-조훈현(스피드)-이창호(두터움)으로 이어진 한국바둑사는 스피드와 두터움이 번갈아 승리했다.이번에 다시 스피드가 두터움에 내줬던 영예를 되찾을 수 있을까. 뚜껑을 열기 전엔 아무도 모르는 승부다. 프로기사들조차 이세돌의 상승세가 무섭다는 쪽과 이창호의 막강한 저력을 감안할 때 아직은 때가 이르다는 쪽으로 나뉘고 있다.

왕위전 최종결승전은 13일 한국기원에서 열린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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