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문제硏 창립 45주년 기념 특강 앞둔 최장집 교수]유능한 정부가 '민주주의 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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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 3년간 언론과의 접촉을 거의 끊고 지낸 최장집 교수는 아세아문제연구소(이하 '아연')소장을 맡으며 세계 여러나라의 민주주의 진행과정과 한국의 사례를 비교하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아연 창립 45주년을 기념해 최교수는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갈등'이란 주제로 여섯 차례 특강을 준비중이다.

'정치의 과잉'을 지적하는 시대에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8월 12일부터 열릴 특강에 앞서 최교수를 만나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에 대해 들어봤다.

"정치학 용어에 '디센칸토(desencanto)'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페인 민주화 과정에서 나온 용어로 '실망'이나 '비애'를 뜻합니다. 민주화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높은 기대감이 독재 정권을 물리치고 들어선 정부의 실제 성과에 실망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권은 물론 스페인·그리스 등 유럽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최교수는 말한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는 '디센칸토'의 의미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보여준 사례입니다."

기대와 실망의 정치학이 세계적 현상이라 쳐도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통령 아들의 비리를 옹호할 순 없습니다.대통령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선 안됩니다. 우리 사회가 부패에 약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각종 인허가 등 권력이 행사되는 모든 접점에 부패의 요소가 스며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누가 정권을 잡아도, 또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한다 해도 이같은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민주화의 실질적 효과를 얻기 힘들다고 최교수는 지적했다.

"권력을 분산시키는 방안은 보다 종합적인 논의를 거쳐 장기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헌법 개정을 논의해선 안됩니다."

최교수는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우리 사회도 '절차적 민주화'의 틀은 거의 잡혔다고 평가한다. 민주주의 제도적 틀은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형식을 채워갈 민주주의의 내용이라고 최교수는 강조한다.

"한국 사회가 점차 다원화돼 가고 있지만 여전히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연고 중심의 관습이 곳곳에 만연해 있습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사회가 보다 건강해져야 합니다."

최교수는 우리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율적 집단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교수는 궁극적으로 "유능한 정부와 활력있는 시장, 그리고 자유로운 시민사회가 어우러지는 것이 우리가 실현해야 할 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적'이란 수식어 대신에 '유능한'이란 표현을 쓴 것이 새롭다.

"유능한 정부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주요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 가는 책임있는 정부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에서 최교수는 "현재 정치권은 당면 과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IMF 이후 부각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에 따른 고용 불안정, 복지, 사회정의 실현 등 삶의 질과 직결된 근본적 문제, 그리고 탈냉전과 평화의 실현 등을 놓고 정치권이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역감정을 왜 지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최교수는 "지역감정이 다른 이슈들을 압도하며 지나치게 표출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감정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독립 변수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지역간 생산량의 차이나 1인당 소득의 격차가 있어야 지역감정의 비교가 가능한데 실제로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감정을 과도하게 부각해 온 정당들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정책 경쟁을 벌여 나갈 때 지역감정 문제도 함께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최교수는 내다봤다.

'정치의 과잉'을 비판하며 정치의 기능을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최교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현실화한다 해도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시장이 모두 구현할 수는 없다"면서 "갈등을 해소해 가는 과정으로서 정치의 기능은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고 밝혔다.

최교수는 "중요한 것은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해소할 수 있는 민주정치의 실천"이라고 덧붙였다.

나아가 최교수는 "투명한 경쟁의 원리가 특히 정치권에 더 많이 도입돼야 한다"면서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대변하고 조직해 내는 정당 정치의 발전이 곧 민주주의의 구체적 형식이자 내용이며 성숙한 정치의 실현"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큰 것일까. 정권 차원의 잇따른 비리를 보며 착잡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대와 실망의 비례 관계를 절감하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최장집(고려대 정외과)교수다. 현 정부 초기에 개혁정책을 기획하는 일에 참여한 경험이 있기에 최근 정국을 보는 최교수의 느낌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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