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시인은 "자연은 사람의 눈을 만나 비로소 풍경이 된다"고 읊었다. 자연과 놀기 좋은 계절 여름이 맹렬하게 불꽃을 피워 올리며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자연을 풍경으로 만든 그림 속에서 그 폭염을 식혀본다.
편집자
"못이 맑아 깊어도 바닥 보이니/목욕을 마치어라, 파란 물무늬/못 믿을 건 세상 일/더운 여름길이 속세의 때 벗겨 주누나."
조선조 문신이며 유학자였던 김인후(1510~60)가 남긴 이 오언절구 '조담방욕(槽潭放浴)'은 전남 무등산 자락에 들어앉은 소쇄원에서 미역을 감고 나서 쓴 즉흥시다. 그의 벗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은 자연의 기운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로 합일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애쓰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간 두 사람은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은둔한다"는 공자의 말을 실천했으며, 소쇄원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 그대로 두 선비의 그런 절개와 지조를 지켜준 정신적 고향이었다.
'조담방욕'은 김인후가 소쇄원 경관들에 붙인 마흔 여덟 수의 '소쇄원 48영' 가운데 하나로, 사화와 당쟁을 피해 탈속한 삶을 살았던 당대 처사들의 마음이 잘 드러난 시로 널리 사랑받았다. "못 믿을 건 세상 일"이란 한 구절에서 어지러운 세파에 진저리를 치는 김인후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이 '소쇄원 48영'에 감동해 한 수 한 수마다 그 장면을 그린 이는 화가 하성흡씨다.
광주에서 활동하며 소쇄원을 아꼈던 그는 '소쇄원 48영'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고 이를 주제로 한 책 『긴 담장에 걸리운 맑은 노래』(현실문화연구 펴냄)도 내놨다.
그 가운데 한 점이 이 '조담방욕'이다.'조담'은 소쇄원 안에 있던 말구유통처럼 생긴 못인데, 바닥의 돌이 다 보일 정도라니 물이 얼마나 맑았을까 짐작이 간다.
휘늘어진 늙은 소나무가 저절로 만든 차일 아래서 처사 한 사람이 느슨하게 풀어헤친 옷차림으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다. 때는 한 여름, 맑은 물에 목욕하며 속세의 때를 벗기니 번잡한 인간세는 멀리 달아나고 절로 도의 경지에 이른 신선계가 문득 앞에 펼쳐진다.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고, 한낮 뜨거운 태양과 그늘이 보이며, 그 품에 안겨 한 선비는 자연 삼매에 들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가 소쇄원을 일러 "청각적인 정원이며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입체적인 정원이고, 궁극적으로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문학적 정원"이라 한 말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순간이다. 그림 속 선비는 간 데 없지만, 풍경은 남아 옛 사람들의 하늘과 뜻을 전한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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