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의식 서둘러'마늘 문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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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덕수(韓悳洙)청와대 경제수석이 19일 취임 6개월 만에 물러났다. 2000년 7월 韓수석과 함께 중국과의 마늘 협상에 참여했던 서규룡(徐圭龍)농림부 차관도 마찬가지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이들을 갑자기 경질한 것은 농민들의 반발과 정치권의 공격 수위가 워낙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런 분위기에서 韓수석이 희생양이 된 것"이라며 "개인으로선 억울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마늘 협상 때 5억달러의 휴대전화 수입 거부 등 중국 측의 무역 보복을 당할 것인지, 1천5백만달러를 위해 마늘 농가를 보호할 것인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韓수석은 무역보복은 피해가면서 농민들을 위해서는 3년간의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얻어냈다.

하지만 2002년 말 세이프가드가 종료한다는 사실을 농림부가 즉각 농민들에게 알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숨긴 꼴이 됐다는 것이다.

韓수석은 이날 "당시 세이프가드 종료 얘기를 다른 중요한 문제 때문에 덜 중시하는 바람에 언론 보도자료 등에 담지 않았고, 그 점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면서도 "당시의 협상 내용은 최선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韓수석은 사흘 전 이 문제가 불거지자마자 바로 金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즉각 수리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옷 로비 사건 등에서 보듯 여론에 떼밀려 물러나게 하지 않는 게 金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그런 金대통령이 이날 전격적으로 사표를 수리한 것은 8·8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나 연말 대선에 마늘 문제가 계속 이슈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친인척 비리 책임 문제로 정치권 등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국정원장 등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까지 겹쳐 부담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다른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날 오전에 차관급 9명의 인사를 하고서, 오후에 이들을 추가 경질한 것은 모양새가 사납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전에 차관급 인사를 단행한 의미도 희석될 수밖에 없다.

과천 관가는 "국익을 감안해 정당한 정책결정을 했는데, 뒤늦게 터진 작은 문제를 빌미삼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삼으면 누가 소신있게 일할 수 있겠느냐"며 어수선하다.

여론과 정치권의 공격을 받는 金대통령의 권력 누수가 행정부에서도 만만치 않을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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