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산 속에서… 상쾌함 더하는 표어 한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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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례 하나. 얼마전 취재차 가야산 해인사를 찾았을 때, 절 문앞 산자락에 걸려 있던 플래카드가 가슴에 쏙 들어왔다.

'쓰레기를 버리는 그 마음을 버립시다'.

단순히 강압적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하거나, 은연중 동참을 강요하는 '쓰레기를 치웁시다'보다 얼마나 운치가 있던지. 역시 큰 도량 답다는 생각과 함께 그 여운이 마음에 남았다.

사례 둘. 얼마전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우연히 차량 맨 끝의 노약자석 앞에 서게 됐다.'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라는 익숙한 구호 대신 이런 글을 보게 됐다.

'젊은이, 이 자리가 그리 탐나우 ? '

능청스러운 할머니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음은 물론이다.

사례 셋. 얼마전 인터뷰를 하기 위해 KBS를 방문했다가 화장실에 들렀다. 변기 위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나를 소중히 대해주면 내가 본 것을 비밀로 하겠어요'.

유머러스하고 애교스럽고 조금은 에로틱하기까지 했다.

학창 시절 수많았던 구호들이 생각난다. 대부분 '뭘 하자' 또는 '뭘 하지 말자'식의 직접적이고 강압적인 내용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최근 들어 이렇게 유머를 담거나 한구절의 시구를 연상시키는 문구들로 바뀌고 있다. 강압적인 방식으로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간접적이고 세련된 비유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전달이 가능하게 됐다는 증거이리라.

최근 보는 이의 가슴을 가장 뭉클하게 했던 구호는 아무래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들이 펼친 카드섹션 '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닌가 싶다. 국민 모두가 간절히 원했던 16강의 꿈. 그 염원을 성취한 기쁨을 붉은 악마들은 이렇듯 간명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따지고 보면 전국 곳곳을 휘감고 굽이쳤던 '붉은 물결'이 별다른 풍파 없이 다시금 잔잔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성숙해진 시민의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 아닐까. 우리 사회가 이렇듯 성숙했다는 사실을 주위의 표어 한장으로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새삼 흐뭇하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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