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4>제102화 고쟁이를란제리로 : 33. 고탄력 스타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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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나는 브래지어보다 스타킹을 먼저 만들었다. 브래지어는 1963년부터 만들었지만 스타킹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57년이다. 국내 스타킹 역사의 출발이기도 했다.

당시 스타킹의 소재는 나일론이었다. 나일론은 최초의 합성섬유로 각광을 받았지만 단점도 많았다. 앉았다 일어나면 스타킹의 무릎 부위가 붕 떴다. 한번 늘어난 곳은 원상회복이 안됐다. 또 종아리에 잘 붙지 않아 흘러내리기 일쑤였다.

80년대 초 미국에 갔을 때다. 백화점 양품 코너에서 무심코 스타킹 하나를 집어들었다.

"신제품입니다. 다리에 착 달라붙어 흘러내리지 않습니다."

여자 판매원이 설명했다.

나는 스타킹을 잡아당겨 보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름도 안지고 다리에 달라붙는 게 아닌가.

"바로 이거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서포트(support) 스타킹'이라고 했다. 종아리를 신축성으로 받쳐준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나는 여러 켤레를 사와 디자인실에 넘겼다.

"다리와 히프에 착 달라붙어 착용감이 아주 좋습니다."

직원들의 평가는 좋았다. 우리는 서포트 스타킹을 '해부'했다.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원리는 의외로 간단했다. 탄력성이 뛰어난 스판덱스 실을 원료로 쓴 것이었다. 여기에 나일론 실을 칭칭 감아 만든 실을 '커버링(covering) 실'이라고 했는데, 이 실로 스타킹을 짰던 것이다.

나는 83년 커버링 실을 수입해 서포트 스타킹을 만들었다.이름은 '고탄력 스타킹'이라고 했다. 탄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획기적인 신제품을 개발했다고 자부한 나는 직원들에게 보너스 줄 생각부터 했다. 그러나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었다.

"고탄력 스타킹이 영 안팔리는데요."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값이 비쌌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일론 스타킹은 한 켤레에 6백원 했다. 고탄력 스타킹은 1천5백원짜리였다. 느닷없이 값이 두배반으로 뛴 스타킹의 출현을 여성들은 즉각 환영하지 않았다.

"나일론 스타킹의 시대는 간다."

"고탄력 스타킹의 시대가 온다."

나의 믿음은 강했다. 시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히려 대량생산 채비를 했다.

86년 이탈리아에서 커버링 실 짜는 기계 14대를 들여왔다. 91년에는 초고속 기계로 3백12대를 더 들여왔다. 당시에는 동양 최대 규모라고 떠들었다. 4백억원이란 거액을 들인 투자였다.

"투자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이러다간 큰일나겠습니다."

회사 간부들은 나를 말렸다. 모두들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투자에 대한 '베팅'을 밀어붙였다.

편직기 한 대를 하루 종일 돌리면 3백~4백 켤레의 스타킹을 짤 수 있었다. 커버링 기계 한 대에서는 7백~8백 켤레를 만들 수 있는 커버링 실을 짜냈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는 우렁찼지만 백화점 매장은 조용했다. 고탄력 스타킹은 값만 비싼 신제품으로 몰렸다. 한달에 7백만 켤레 이상을 생산했지만 대부분이 창고에 처박혔다. 향상된 품질을 알아주지 못하는 여성들이 야속했다.

"소비자들이 깨닫도록 해야 한다."

나는 소비자들이 고탄력 스타킹의 우수성을 확인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은 얼마든지 들여도 좋습니다. 광고를 집중적으로 합시다."

우리는 고탄력 스타킹이 왜 좋은지를 알리는 데 힘 썼다. 그제서야 여성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탄력 스타킹의 판매에도 서서히 탄력이 붙었다.

고탄력 스타킹을 한 번 신어 본 여성들은 나일론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착용감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5년 전 나일론 스타킹 생산을 그만뒀다. 이제 나일론 스타킹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났다. 고탄력 스타킹에 베팅한 내 판단은 옳았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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