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大作불패' 신화가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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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블록버스터란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고, 만족을 주고, 기억에 남게 하는 대작(大作)영화를 말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규모면에서 할리우드에 비교할 수 없으나 나름대로 큰 돈을 들여 만드는 작품으로, '쉬리''공동경비구역 JSA'의 흥행에 힘입어 날개를 달았다. 하지만 올 들어 그것은 실패 일변도다. 우리 대작영화의 체력저하 요인과 새 길을 3회에 걸쳐 진단한다.

◇제작비 급등의 함정=지난달 선보였던 '예스터데이'는 순제작비 60억원에 마케팅비 20억원을 더해 총제작비가 80억원에 이른다고 개봉 전에 발표했다. 많은 언론도 80억원이란 거금을 주목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거짓말로 밝혀졌다. 실제 들어간 돈은 48억원이었다.

<별표 참조>

'예스터데이'의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대마불사(大馬死)'를 고려했다. 일단 큰 영화인 것처럼 보여야 장사도 된다는 의견이 강했다"고 고백했다. 각기 80억원 가까이 투입된 '무사'나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 제작비를 끼어맞춘 것으로 보인다.

최근 3년 새 한국영화의 제작비는 급등했다. 순제작비 23억원이었던 '쉬리'의 규모로는 이젠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다. 웬만한 드라마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30억원이 기본이다. '무사''화산고''2009 로스트메모리즈''아 유 레디?'를 거치면서 80억원대까지 상승했다.

80억원짜리 영화가 손익을 맞추려면 전국 관객이 3백만명은 되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규모만 키웠을 뿐 이를 떠받치는 구체적 전략이 미흡했던 까닭이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크게 질러 크게 먹는 것은 일리 있는 작전이지만 제작비에 거품은 없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대적 극장 확보와 무리한 홍보 등 마케팅만으론 관객을 끌어들일 수 없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의 위험=블록버스터는 고도의 상업적 계산물이다. 관객 끌기가 지상 목표인 기획상품이다. 때문에 특수효과·컴퓨터 그래픽·액션 등 현란한 볼거리가 우선이며, 줄거리는 단순·명료할수록 유리하다. 할리우드에선 영화라기보다 이벤트로 부른다.

블록버스터의 작동원리는 냉장고나 자동차를 파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기간에 승부가 나는 만큼 정치한 계산이 필요하고, 시대의 감성을 적시에 건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각기 60억원이 넘게 투여된 휴먼 드라마 '취화선'이나 '챔피언'을 블록버스터로 부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우리 대작영화는 이런 기본적 원칙을 도외시한 느낌이다.

영화계의 자신감을 반영한 탓이지 오히려 역방향으로 움직인 꼴이 됐다. 액션이면 액션, 특수영상이면 특수영상 등등 장르별 특성을 극대화하지 못하고 화면과 내용을 어정쩡하게 타협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무슨 얘긴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얘기를 분산시키다가 막판에 줄거리를 일시에 일러주는 '예스터데이'나 각기 아홉명과 여섯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파고들려다 캐릭터 제시에 실패한 '무사'와 '아 유 레디?', 어려운 한자가 끼어들고 만화 같은 얘기로만 일관한 무협활극 '화산고' 등의 실패 원인도 이같은 불분명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아 유 레디?'의 작가 고은님씨는 "애당초 등장인물의 절반은 포기하고 갔어야 했다. 한명이라도 제대로 그려야 했다"라며 아쉬워했다.

◇겉만 베낀 할리우드 모방=영화평론가 김의찬씨는 "최근 실패한 대작영화의 공통점은 할리우드의 핵심인 정교한 영화 컨셉트나 탄탄한 장르적 기본기를 무시하고 영화의 외형적 측면한 모방한 경우"라고 진단했다. 이른바 '카피우드'(Copy+Hollywood)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외국 관객들에겐 비판을 받지만 사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엔 공식 비슷한 코드가 있다. 분열된 가족의 화합을 도모하거나 미국인의 애국심을 은연중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그런 뻔한 내용을 그럴듯한 플롯으로 풀어가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진주만'을 제작한 제리 브룩하이머는 "한 작품의 컨셉트를 놓고 10년을 뜯어고친다"고 말할 정도다.

반면 우리의 경우는 주먹구구식 제작 관행이 여전하다. 심지어 영화를 촬영하면서 구성이 바뀌고, 제작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1백억원이 넘게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추석 개봉 예정)은 벌써 공약했던 개봉 일자가 1년 가까이 지연되고 있다. 기획 단계부터 부실한 영화가 좋은 결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가 아닐까.

평론가 심영섭씨는 "위기론이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다. 부실공사의 원인을 알아야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정호·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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