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본주의 위기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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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 자본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최근에 엔론·월드컴 등 미국의 대표적 기업들의 회계 부정이 드러나면서 미국 자본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붕괴되고 있다. 다음에는 어느 기업의 부정행위가 드러날 것인가 하는 불안한 심리 상태는 지난해 9·11 사태 이후 다음에는 무슨 테러가 터질까 불안해하는 심리상태와 비슷하다.

자본주의 경제는 투자자들의 신뢰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물론 투자행위에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시장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신뢰가 가능해야 한다. 만일 미국이 최근에 터지고 있는 기업들의 회계부정으로 인한 신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 자본주의 경제를 모델로 삼았던 나라들은 모두 엄청난 위기에 놓이게 된다. 미국 기업들의 회계부정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식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한국이 채택한 경제 모델

지금 필요한 것은 미국 시장 시스템이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업 경영자들의 부정한 행위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9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대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을 제외하고는 투자자·전문가들 모두가 부시의 제안에 대해 큰 실망을 나타냈다. 부시의 연설이 있은 다음 증권시장은 곤두박질을 하면서 하강했고, 언론들은 일제히 부시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그럴 듯한 수사를 늘어 놓았지만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는 비판을 퍼부었다.

부시 대통령은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외교·군사 분야에 있어서도 모든 갈등관계를 선과 악으로 분리하는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 같다. 복잡한 국제문제도 악의 세력만 제거해 처벌해 버리면 된다는 식이고, 기업 부정문제에 대해서도, 기업을 악의 기업과 선의 기업으로 구분하고 악한 기업들을 발본색원해 처벌하면 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은 지난 9일 월가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기업 범죄에 대한 수사 및 처벌을 강화하자는 제안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부정 행위의 동기가 없어지지 않는 한 회계장부 조작 같은 부정 행위가 사라질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결국 주주의 이익만을 최고 가치로 추구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구조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최고 경영자의 이익 동기와 관련된 근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놓아두고 지엽적인 측면만 손을 대서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미국 행정부뿐만 아니라 의회·학계·재계 등에서 논의되는 과정을 통해 어떤 구상과 계획이 나오겠지만 우리도 단순한 방관자일 수만은 없다.

우선 1997년의 외환 위기 이후에 우리는 미국 모델을 기준으로 우리의 금융 시스템을 개조해왔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자신의 분석이나 판단보다 미국 모델이 가장 성공적이라는 믿음을 갖고 미국식 자본주의 경제를 지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의 금융제도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금융 제도 등 점검 기회로

그러나 미국식 모델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미국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미국 증권시장에 스캔들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미국 금융시장에 위기가 처음 닥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주가가 하락하는 이유 가운데는 물론 최근의 부정행위도 있지만 90년대에 쌓였던 거품도 한몫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에 대해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미국이 당면한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가를 예의주시하면서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경제 모델에 대한 보다 철저한 검토작업을 해야 하겠다. 장기적으로 보면 경제 모델의 문제가 안보·군사문제보다 세계 질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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