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냐 왕따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존경과 사랑을 보낸다'는 친필 사인과 함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이어준 끈은 '소신'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편지에서 '나와 당신을 비교하긴 어렵겠지만 공통점이 있다. 주관이 뚜렷하고 신념에 따라 살아온 당신이 존경스럽다'고 했다. 白소장이 대표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매우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히딩크와 백기완의 차이

히딩크 감독은 '영웅'이 돼 한국을 떠났다. 히딩크 감독은 실력도 있지만 소신대로 밀어붙여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존경을 표한 白소장은 어떤가. 여전히 '재야 운동가'일 뿐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히딩크 감독에게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과 이용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라는 서포터가 있었다. 그들이 확실하게 뒤를 밀어줬기 때문에 히딩크 감독은 소신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히딩크 감독도 1년반 동안 두 차례 큰 고비가 있었다. 프랑스와 체코에 0-5로 대패했을 때 그의 능력을 의심받았고, 북중미 골드컵에서 부진했을 때 경기를 앞두고 체력훈련을 했기 때문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 때 히딩크의 '바람막이'가 돼 준 사람이 이용수 위원장이었다. 위원장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운동 생리학을 공부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히딩크 감독의 훈련은 내가 배운 것과 일치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다."

또 이런 말도 했다.

"결과가 좋았으니 그냥 넘어갔지만 만일 결과가 나빴다면 함께 비난받았을 것이다."

위원장 역시 소신대로 밀고 간 것이다.

만일 이 때 위원장이 '히딩크 감독이 뭘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돼'라고 한마디만 했어도 그 이후의 일은 불보듯 뻔하다.

히딩크는 '축구의 ABC도 모르는 무식한 감독'으로 낙인찍히고,'또 한 명의 실패한 외국인 감독'이 돼 쓸쓸히 한국 땅을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외국인 감독은 안돼. 한국식 축구를 해야 돼'라는 목소리가 커졌을 것이고, 한국 축구의 업그레이드는 기약할 수 없는 미래로 또 넘겨졌을 것이다. 영웅이 되느냐, 왕따가 되느냐는 찰나에 결정된다.

월드컵이 끝난 후 국내 프로리그인 K-리그가 뜨고 있다. 월드컵 열기가 그대로 이어져 연일 관중이 몰려들고 TV가 골든타임에 생중계를 하고 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이 열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하다. 성공의 키는 누가 쥐고 있는가. 선수나 감독이 아니다. 엉뚱한 얘기 같지만 구단주와 단장이다.

'재미있는 경기가 밥먹여주느냐.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우승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우승하라'고 다그치는 순간 공든 탑은 무너질 것이다.

주변에서 '히딩크'발굴을

요즘 '히딩크 경영학'이 화두다. 최고경영자(CEO)들 사이에서는 '히딩크를 배우자'는 움직임이 번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CEO들은 히딩크를 배우지 말고 정몽준이나 이용수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히딩크는 실무자다. CEO들이 직접 필드에 나가서 직원들을 지도하고 이끌어 나가는 것보다는 실무자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 회사에 있는 히딩크'를 발굴하는 게 CEO들이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력과 소신이 있어야 한다. 귀가 얇아서도 안된다. 실력있고 소신있는 '히딩크'는 우리 주변에도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