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부터 '공정 공시제도' 시행되면 기관·개인 정보격차 줄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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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원칙에는 공감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걱정되는 부문도 많다."

금융감독원이 9월 도입할 예정인 '공정공시 제도'에 대한 상장·등록업체 관계자들의 말이다. '공정공시 제도'란 상장·등록법인의 고위 임원 등이 애널리스트·기관투자가·기자 등 일부 계층에만 주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이다.

◇왜 도입하나=이런 규정을 만드는 것은 물론 기관투자가와 일반 투자자들 간의 정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상장·등록 기업은 애널리스트나 기관투자가에게 실적·경영 환경 등 주요 정보를 귀띔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반인에 비해 한발 앞서 정보를 입수한 애널리스트나 기관투자가는 주식 매매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실제 KT는 지난 4월 1분기 실적 발표에 앞서 몇몇 주요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을 초청해 실적과 향후 민영화계획 등을 알려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기업들은 몇몇 친밀한 애널리스트나 기관투자가에게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실적을 발표할 때는 이들 전체에게 우선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일반인은 뒷전에 밀리는 것이다.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들의 실적 발표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밟는다. 우선 기업들은 오전 일찍 선택된 기관투자가·애널리스트 등에게 실적 내용을 담은 e-메일을 발송한다. 그런 뒤 이들을 대상으로 콘퍼런스 콜을 받는다.

콘퍼런스 콜이란 기업들이 기관투자가나 애널리트 다수와 동시에 전화를 통해 실적을 설명하고 질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는 공시는 가장 늦게 나온다.

이런 정보 차별은 기관과 일반인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힘 있는 기관과 약한 기관 간에도 정보 차별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주요 기업들은 외국인 주주와 외국인 투자자를 최우선적으로 대우한다. 한 투신사 펀드매니저는 "간혹 외국인에 비해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비애감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예상되는 문제점='공정공시 제도'는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정 회사의 지분을 많이 갖고 있는 기관투자가는 물론 애널리스트들은 정기적으로 해당 기업을 찾아가 그 회사의 실적과 향후 전망 등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리에서 기업 측 관계자가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면 주가는 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정공시제도는 언론사 기업 취재 관행에도 큰 변화를 몰고올 것으로 보인다. 주가에 영향을 줄 만한 주요 기업내용(사업계획·실적전망치·합병 등)을 취재하는 일이 원천봉쇄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벌써부터 기업들은 이를 구실로 기자들의 취재에 협조하지 않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기업들은 외국처럼 공식 프레스 릴리스(자료 발표)만 하겠다며 기자들과 일상 접촉을 꺼릴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공정공시 제도'를 도입한 나라는 현재 미국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표 참조>

미국도 2000년 10월 말 도입한 터라 이 제도의 득실은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금감원이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 기업의 주식담당자는 "고위 임원들이 누구를 만나서 어떤 발언을 했는지를 일일이 점검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제도 도입으로 인해 조회공시 업무가 폭증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전업 주식담당자를 두고 있지 못한 중소기업의 관계자들은 "계도기간과 유예기간을 둬 내년 이후에 도입해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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