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국면전환 '脫DJ' 승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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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당 노무현(武鉉)대통령후보가 4일 위기탈출을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 대한 중립내각 구성 건의와 부패청산 특별입법을 위한 한나라당 이회창(會昌)후보와의 회담 제의, 金대통령 장남 김홍일(金弘一)의원과 아태재단 문제에 대한 직접 언급 등이다.

그동안 후보가 예고해온 '청산 프로그램'의 내용이기도 하다.

이날 기자회견은 후보의 직접 지시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천정배(千正培)·이강래(康來)의원 등 핵심측근들은 3일 심야회동에서 회견내용을 점검했다.

회의에서는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반대도 있었으나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서해 무력도발 사태의 파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회견을 강행키로 했다고 한다.

한화갑(韓和甲)대표의 '조용한 해결'속도가 지지부진한 것도 회견 강행의 한 배경으로 보인다.

이날 후보는 청와대와의 긴장관계를 불사하고라도 탈(脫)DJ 노선을 취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후보의 입장은 김홍일 의원 및 아태재단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 나타났다.

후보는 두 문제에 대해 "대통령과 金의원이 결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 정서를 이유로 들었다.

金의원이나 아태재단 문제는 청산 프로그램의 본질이 아니라는 기존 입장에서 벗어난 것이다.

중립내각 구성 요구도 마찬가지다. 후보는 金대통령을 직접 공격하는 자극적 표현은 피했지만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침범 내지 압박으로 비춰질 요구를 한 셈이다. 문제는 후보의 제의가 현실화할 가능성이다.

일단 후보 측은 청와대의 부정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중립내각 구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서해교전 문책론이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고, 8·8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를 희망하는 장관들이 있어 개각요인은 잠재해 있는 상태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후보의 요구사항 중 박지원(朴智元)청와대 비서실장의 거취에 대한 언급이 빠진 점이다. 당내 쇄신파 의원들은 청와대 비서실의 개편을 거세게 요구해왔고, 일부 의원들은 이 문제를 탈DJ의 핵심이라고까지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민주당 핵심관계자는 "후보가 朴실장 문제까지 들이대면서 金대통령을 압박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金대통령의 퇴로까지 차단할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 측면에서 후보는 기자회견의 불가피성을 청와대 측이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청와대가 어떤 형태로든 전격적으로 후보의 제안을 수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그래서 나온다.

후보는 내부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끌어들이는 전략도 병행했다.

반부패 특별입법을 위한 회담을 제의하면서 후보가 제시한 제도적 방안 중 ▶인사청문회 확대▶일정액 이상의 후원금 기부시 수표사용 의무화 등의 내용은 이미 한나라당도 부패방지책의 일환으로 주장해온 내용들이다.

한나라당이 거절할 수 없는 내용들을 선별한 흔적이 엿보인다. 만약 회담이 성사되면 부패청산 문제의 주도권을 쥘 수 있고, 회담이 거절되면 "한나라당의 부패청산 의지가 약하다"고 공격할 여지가 생긴다는 계산이다.

더구나 정국을 노무현 대 이회창 대결구도로 전환하면서 당내 비주류의 도전을 당분간 둔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해석된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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