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후보의 '脫DJ' 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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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기자회견은 '탈(脫)DJ(김대중 대통령)'의 의지를 과시할 수 있는 여러 아이디어와 소재를 담으려고 했다. 국무총리와 법무·행정자치부 장관 등 경질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한 중립내각 요구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도전하는 듯한 인상을 줄 만하다. DJ가 만든 아태재단의 정리와 김홍일 의원의 탈당문제에 대해선 "대통령과 金의원이 결단해야 한다"고 압박 강도를 높였다.

'발상의 대전환'이란 화려한 수사(修辭)까지 곁들인 후보의 제안들은 기존의 민주당식 사고방식을 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부패 청산을 위한 제도적 프로그램은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만하며, "여당 후보에게 주어졌던 모든 프리미엄을 포기하겠다"는 자세도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제안과 다짐에는 DJ와의 차별화 효과와 정국 주도권을 의식한 대선 전략적 요소가 깔려 있어 설득력과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

초당적인 중립내각 문제는 한나라당의 참여 거부에다 청와대의 불만 표시 탓에 거꾸로 내각의 안정성을 헝클어뜨릴 수 있다. 공개적인 압박을 받고 장관을 바꾼다면 대통령의 임기 말 국정 장악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후보가 강조한 중립·거국의 효과도 얻기 힘들다. 법무부 장관의 추천권을 한나라당에 주자는 것도 내각의 유기적 협조 측면에서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후보가 여기에 무게를 둔 것은 탈DJ의 이미지를 다지려는 국면 전환의 고육지책으로 보여 설득력을 높이기 힘들다. 청와대와 후보의 갈등은 민주당이 내심 바라는 장면일 것이다.

후보는 "현 정부에서 발생한 의혹 사건들은 金대통령 임기 내에 종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인식은 적절하다. 부패 청산을 위한 법적 장치의 조속한 입법 제안은 여론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후보가 DJ정권 부패에 대한 책임론을 그냥 넘긴 데 있다. 대통령과 민주당의 공동 책임론을 편 뒤 그런 제안을 했다면 호소력을 높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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