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4>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 : 23. 쌀 수출과 영어 공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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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우리가 일본에 쌀을 수출한 적이 있다. 나는 마침 그때 한국미곡수출조합 이사로 일하고 있었다.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미국의 원조는 차츰 줄기 시작했다. 국제수지는 악화일로였다. 자립경제를 외친 장면(張勉)정부는 국내에서도 귀한 쌀을 일본에 수출하기로 했다.

정부는 네명의 협상단을 부랴부랴 만들어 일본에 파견했다. 단장은 미곡수출조합 최이혁(崔赫) 이사장이 맡았다. 60년에 조합 이사로 선임된 나도 협상단에 포함됐다.

우리는 일본 긴자도큐(銀座東急)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개관한 지 20일밖에 안됐을 때였다. 일본측 협상단은 16개 쌀 수입회사로 구성된 협의회였다.

낮에는 협상을 하고 밤에는 서울에 협상결과를 보고했다. 당시 농림부 양정(政)국장 댁에 국제전화를 걸어 다음 지시를 받곤 하는 긴박한 나날을 보냈다.

우리 파견단은 당시 주일공사관 이원경(源京) 참사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도쿄(東京)제대를 나온 그는 영어를 잘해 협상에서 큰 역할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마라톤 협상 끝에 우리는 일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쌀 3만t을 수출하게 됐다.

"영어를 아주 잘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협상을 끝낸 후 나는 이원경 참사관에게 인사했다.나는 중국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으나 영어와 일어는 실력이 많이 모자라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 만주 신징(新京)에서 중학교(시립공학원)를 다니던 시절 영어 교사였던 길익선(吉益宣)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최규하 전 대통령과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이기도 했는데, 나중에 농림부 국장까지 지냈다.

"일본에 쌀을 수출하기 위해 갔다가 영어 실력이 모자라 곤욕을 치렀습니다. 영어와 일어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선생님은 나에게 일본 고베(神戶)대학원 입학을 주선했다. 당시 고베 시장으로 있던 하라구치(原口)는 만주 시절 신징시립공학원 설립자이면서 교장을 지낸 분으로 선생님과 연락이 닿고 있었다.

나는 65년 두 분의 도움으로 고베대학원 경영학 연구과 연수생으로 입학하게 됐다. 40세 때의 일이니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셈이었다. 경영학 석사과정에서 조직론을 전공했다. 수업은 일어·영어 원서로 했다. 이때 나는 두 나라 말을 배울 수 있었다.

회사 경영을 책임질 적임자가 없어 고베대학원을 1년만 수료하고 귀국한 나는 집에서 아내와 영어로만 말을 주고받기로 했다. 무역업을 하려면 영어는 필수였다.

해방 후 47년 무역회사(경남무역)에 다닐 때 라디오로 영어를 공부하고 강습소에 다니거나 개인교습을 받기도 했지만 어설픈 수준이었다.

내가 결혼을 한 것은 서른살 때다. 미국 뉴욕에서 아내를 만났다. 플로리다주 사우스 칼리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던 아내는 영어 실력이 월등했다.

우리 부부는 집안에서 영어로만 말하기로 했다. 약속을 어길 때면 벌금을 1백원씩 물기로 했다. 영어에 자신이 있던 아내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루에 열 번 틀려도 매번 돈을 물어야 해요!"

아내는 내게 다짐까지 받아두었다.

처음에는 내가 규칙을 많이 어기는 편이었다.벌금이 1천원을 넘는 날도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내가 벌금을 물렸다.

아내는 평소 실력으로 영어를 했지만 나는 회사에 나가서도 틈 날 때마다 영어공부를 했다. 집안에서 영어로만 말한 지 몇년 후에는 아내가 벌금을 더 많이 물었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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