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의 세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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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의 월드컵 결승 진출 여부를 결정하던 날, 미국 월드컴사의 회계부정이 알려지면서 뉴욕 증시는 요동했다. 우리가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역량과 열정적인 응원 덕분에 한국의 대외 이미지가 26조원 이상 홍보 효과를 누렸다고 기뻐하던 그 날, 뉴욕 증시의 영향을 받아 한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하루 동안 깨진 주식의 시가 총액이 25조7천억원에 달했다. 우리가 월드컵이 전부인 줄 알고 빠져 있는 사이에도 세계는 다른 일로 돌아가고 있었다. 3, 4위전을 구경하기 위해 오전부터 서울 시청 광장으로 모여든 응원 군중은 대형 화면 속에서 서해교전 소식을 듣고 "아! 바로 우리 머리 위에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구나"를 실감했다. 그제야 월드컵의 기쁨과 환희가 얼마나 취약한 구조 속에 있는 것인 줄을 깨닫는다.

우리끼리만 뭉쳐서야

우리는 지난 한달 동안 월드컵에 묻혀 지냈다. 한국 신문과 방송만 보았다면 세계는 월드컵 말고는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없는 듯 보였다. 한국기자협회가 한·일간 월드컵 기사비율을 조사했다. 시작부터 16강 결정 때까지 16일 동안 두나라 신문들을 비교했는데 우리 신문이 일본에 비해 1.7배 더 많이 보도했다. 8강과 4강에 오른 이후는 비교해 볼 필요도 없다. 이런 우리 언론을 두고 "모든 신문의 스포츠 신문화, 모든 방송의 스포츠 방송화"라는 자조 섞인 비판도 있다. 이런 시각에 대해서는 "모처럼 이룬 국민적 단합을 깬다""일부 지식인의 삐딱한 시각"이라고 오히려 입을 막으려 든다. 그러나 세계는 앞에서 보듯 월드컵 말고도 다른 일로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월드컵 예선이 한창이던 지난달 초순 유럽 몇개국의 신문사들을 둘러볼 기회에 스위스 취리히의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NZZ)'신문사를 방문했다. 뉴욕 타임스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신문은 발행부수가 20여만부에 불과하지만 1백50명의 편집국기자 가운데 50명의 해외 특파원을 두고 있다. 6~7개의 섹션으로 발행되는 이 신문은 1면을 포함한 첫 섹션이 언제나 국제기사다. 왜 국제기사를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느냐는 질문에 마르코 사장은 "스위스와 같이 작은 나라는 정치나 경제가 국제환경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국제뉴스를 국내뉴스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답변했다.

우리는 세계화를 외치고 있다. 우리같이 국토가 좁고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해외로 뻗어 나가지 않으면 살길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구나 입만 열면 이번 월드컵을 그러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기회를 반쪽 밖에는 활용치 못했다. 외국인들은 우리의 경기와 응원을 유리창 통해 보듯 훤히 꿰뚫어 보면서 "무서운 민족이다, 다시 보아야겠다"고 우리를 평가하고 있지만 우리는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최소한 우리와 경기를 하는 국가들만이라도 그 나라는 어떤 위치에 있으며 우리와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국민들이 알 수 있게 해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골을 몇개 넣었느냐 밖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의 밖이 우리를 알고, 우리가 밖을 아는 것이 세계화의 출발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번에 반쪽의 세계화 밖에 못했다. 박수치고 외치면서 안으로 안으로 우리끼리만 똘똘 뭉칠 때 오히려 밖의 세계에는 경계심만 심어 주는 것은 아닐까.

이젠 눈을 밖으로 돌리자

애국심 역시 세계 속의 애국심이어야만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우리에게 패배한 뒤 심판 불공정 운운할 때 그들이 얼마나 세계와 동떨어진 사람들인가를 알게 됐다. 그러나 지난 겨울올림픽 때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 박탈을 놓고 온 나라가 반미로 몰려가던 우리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다.

우리끼리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는 것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아니, 너무 나갔다. 신문과 방송이 온통 월드컵으로 도배를 하는 것이나, 한달 내내 응원으로 세월을 보내고도 모자라 어제는 휴일, 오늘은 축제일 하며 북을 치는 정부나 모두가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다. 이제 월드컵 정신을 이어받자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그러나 정말로 월드컵이 우리의 세계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면 이제 눈을 밖으로 돌리자.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정신을 차리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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