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용 보석처럼 찬란한 프리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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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패배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이을용(26·부천 SK·사진)이 이번 대회에서 가장 멋진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한국 축구를 다시 한번 세계 축구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전반 시작하자마자 홍명보의 실수로 어이없이 선제골을 내준 뒤 한국 선수들은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세계 최강의 공격진을 자랑하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을 상대해 한 골도 내주지 않은 한국이었기에 선수들은 동요했다.

이후 밀고 밀리기를 5분여. 빠른 시간에 동점골이 터지지 않으면 경기 흐름이 완전히 터키로 넘어갈 듯한 분위기였다. 전반 9분 한국은 터키의 페널티박스 왼쪽 모서리 부근에서 프리킥을 얻었고 이을용이 공 앞으로 다가갔다.

한국은 이번 대회 내내 직접 프리킥으로는 한 골도 넣지 못했기 때문에 득점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이을용은 왼발로 피버노바의 밑동을 감아찼다.

공은 빙글빙글 돌며 터키 골대 구석을 향해 날아갔고, 뤼슈튀 골키퍼의 손끝을 지나 골 포스트를 살짝 스치며 그물을 흔들었다. 평소 늘 무표정한 얼굴에 말없는 이을용도 최고의 프리킥 골을 터뜨린 뒤에는 '그답지 않게'포효하며 기뻐했다.

이을용은 이번 대회에서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경기마다 꾸준한 활약을 보여왔다.

최대의 고비였던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그는 황선홍에게 절묘한 크로스를 날려 첫 골을 어시스트하며 4강 드라마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미국전에서는 페널티킥 실축으로 실망을 안겼지만 결국 안정환의 헤딩골을 어시스트했고 이후에도 최용수 등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주는 등 한국이 무패 행진을 하는 데 그림자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지금은 부동의 대표팀 왼쪽 윙백이 됐지만 그는 한때 축구를 그만 둔 적도 있었다. 강릉상고 졸업 후 프로 진출에 실패한 뒤 축구화를 벗어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혼자 강릉상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연습하던 그는 아마추어팀인 한국철도에 입단, 주전자 심부름을 해 가면서 축구 인생을 이어갔다. 타고난 기량은 주머니 속에 넣어도 삐죽이 솟는 송곳처럼 나타나기 시작, 프로 구단(부천)에 스카우트됐고 지난해 초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다.

이을용은 소속 팀에서도 유일하게 국가 대표에 선발된 보물 같은 존재이지만 별도의 포지션이 없다. 수비에 구멍이 생기면 수비로 내려가고 공격에 힘이 필요하면 미드필더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료 선수들의 뒤편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내는 이을용이 있었기에 한국의 월드컵 4위라는 대업도 가능했다.

대구=특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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