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는 '백혈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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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월드컵 열기 속에서도 인기 절정인 드라마 SBS '유리구두'의 이야기 흐름이 심상찮다.'유리구두'는 주인공 선우(김현주)가 온갖 역경을 딛고 이동통신회사의 팀장으로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그런 선우가 돌연 계획에 없던 백혈병에 걸렸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사랑하는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이 불쌍한 여자에게 난치병이라니. 시청자 홈페이지에는 "너무 잔인하다""선우를 살려달라"는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MBC 아침 드라마 '내 이름은 공주'도 지난 3월 주인공 화영(조민수)이 스토리 전개와 상관없이 갑작스레 백혈병에 걸려 이야기 흐름이 이상해졌다.

드라마에서 백혈병은 단골 손님이다.'유리구두'의 작가는 "백혈병은 골수를 기증받으면 살 수 있는 병이다. 헤어진 자매를 연결하기 위해 설정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러나 친자매임을 증명하는 데 꼭 백혈병이어야 했을까. 극중 두 사람이 자매임을 증명하는 데 유전자 검사나 주변사람의 증언 등 방법은 많다. 그럼에도 백혈병이 애용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백혈병은 전국에 환자가 약 5천여명 정도로 흔치 않은 질병이다. 그런데도 드라마에서는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다른 질병과 달리 깨끗한 이미지인 데다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완치가 가능해 결말을 얼마든지 작가 맘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 유혹 때문인지 최근 몇년 새 드라마 속 인물이 백혈병에 걸리는 '백혈병 드라마'가 유행하고 있다.'안녕 내사랑''가을동화''아름다운 날들''엄마야 누나야'에 백혈병이 등장했다.

드라마 구조가 느슨하다 싶으면 이 병으로 주인공을 죽게 해 시청률을 끌어 올리고, 시청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주인공을 극적으로 살려내기도 한다. 결국 고통스러운 병으로 알려진 백혈병이 TV 전파만 타면 '낭만적인 병'으로 둔갑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전 방영된 베스트극장 '은재네 이야기'나 지난해 특집극 '가시고기'는 백혈병 치료 과정과 가족들의 고통 등 사실적인 이야기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드라마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백혈병이 드라마의 극적 반전을 위한 가벼운 소재로 차용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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