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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동벌이(黨同伐異)와 무상보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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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주 말 연말연시 인사를 하기 위해 관악산 암자에서 수행 중인 은사 스님을 찾아 뵈었다. 차 한 순배가 끝날 무렵 스님은 뜻밖의 화두를 던졌다.

스님이 물었다. "당동벌이(黨同伐異)와 보시(布施)가 무슨 관계냐"

머리를 굴렸지만 이렇다할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동벌이라면 얼마 전에 교수들이 올해 정치판을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꼽은 그 말 아닌가? 뜻을 풀자면 '자기편이 무조건 옳다며, 다른 편을 배척하는 당파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보시는 어려운 이웃에 베푸는 조건 없는 희생이다.

그렇다면? 옳다구나 하며 이렇게 답했다. "요즘 같은 난세에서는 불자들의 보시가 절실하다는 뜻입니다." 스님은 꾸짖었다. "할(喝)! 신문기자라는 자의 통찰력이 겨우 그 정도냐. (한 걸음) 더 나가 보거라."

식은땀만 흘리다 결국 은사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스님이 답을 내렸다. "진흙 속 연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무엇이더냐?"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련한 제자에게 스님은 뜻풀이를 계속했다.

"무상보시(無相布施)가 무엇이냐. 무조건적인 희생이지? 그래서 보살도(菩薩道)라고도 한다. 먹고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 해치는 일을 밥 먹듯 하는 요즘 세상에 수천, 수억원을 익명으로 내는 보시자들이 잇따르는 현상을 너는 무엇이라 보느냐."

그러면서 서탁 밑에서 집어 내보이는 것이 바로 며칠 전 우리 신문에 보도된 '불경기 속에도 익명기부 는다'는 기사였다.

더 이상 말을 아끼시는 스승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오며 스승이 남긴 뜻풀이를 이어봤다. 교수들이 사자성어로 빗대지 않아도 확실히 2004년 12월 말의 한국은 '집단이기주의가 할거하는 혼돈'이라는 표현에 한치도 부족하지 않다. 당동벌이가 어디 정치판에서만 벌어지는 일인가?

올 한 해 우리 사회는 양편으로 나뉘어 수도 없이 대립했다.

원점으로 회귀한 신행정수도 이전 논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4대 개혁입법안, 부익부 빈익빈의 계층갈등, 수능시험 부정 등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싸움 끊일 날이 없었다. 경기는 바닥을 모르게 가라앉고, 살아남기 위해 죽고 죽이는 험한 상황이 여기저기서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말법세상에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따뜻한 기부가 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단지 우리 사회에 아직은 인정이 마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작은 증표일까. 그리 넘기기에는 확산 움직임이 너무 굳건하다. 그리고 세파에 얼어 붙은 가슴을 녹일 만큼 따뜻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올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성금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50% 증가했다고 한다. 단지 부자들의 생색내기가 아니다. 최근에는 기부사실의 공개금지를 조건으로 다는 익명기부도 급증하고 있다.

스님의 화두는 이런 따뜻한 정이 당동벌이의 세상을 종식시킬 예쁜 연꽃이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불가에서 연꽃은 인고(忍苦)의 상징이다. 진흙탕 속에서 꽃을 피운다. 연은 진흙 구덩이 속에서는 그저 그런 잡초처럼 보이지만 피어난 후에는 꽃과 향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스승의 화두를 이렇게 푼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리고 그 뜻풀이를 세상 모르는 산중 구도자의 한담쯤으로 받아넘겨야 할까.

연말이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희망을 계획하는 시점이다. 닭의 해(乙酉年)인 내년은 오행상 목운(木運)과 금운(金運)이 왕성해지는 시기다. 목운과 금운은 각각 성장과 결실을 뜻한다.

내년에는 무상보시의 문화가 더욱 확산돼 당동벌이가 종식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년 말에는 학자들이 꼽은 한해의 사자성어가 대동단결, 고진감래처럼 화합과 성취를 뜻하는 것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임봉수 정책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