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재 그렇게 잘했는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의 수문장 이운재는 2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세계 최고의 GK 올리버 칸과 진검승부를 벌였다. 그들은 의식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전문가와 팬들은 이 대결을 '야신상'이 걸린 한판으로 받아들였다. 야신상은 가장 뛰어난 GK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8강전까지 각각 다섯 경기를 치르는 동안 이운재는 두골, 칸은 한골만을 내줬을 뿐이었다.

두 GK의 맞대결은 양팀의 결승행을 좌우할 열쇠의 하나로 관심을 모았던 카드였다. 세계 축구무대에서 철저히 무명이었던 것은 물론 국내에서도 김병지에 비해 한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아온 이운재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 칸에게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라운드 안의 작은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이운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미 목표를 초과 달성한 터에 두려울 것이 없는 이운재는 독일의 맹공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전반 7분 베른트 슈나이더의 날카로운 오른쪽 센터링을 적극적으로 대시하며 잡아냈고 전반 17분에는 올리버 뇌빌의 강슛을 넘어지며 선방했다.

후반 8분에도 득점 공동선두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헤딩을 침착히 막아낸 이운재는 경기 내내 좌우에서 날아드는 독일의 고공 패스와 장신 포워드들의 무차별 헤딩슛 세례를 정확하게 받아넘겼다.

칸도 역시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였다. 전반 9분 차두리의 패스를 받은 이천수가 강력한 오른발슛을 날렸지만 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동작으로 다이빙해 오른손으로 쳐냈다. 다시 8분이 흐른 뒤 박지성이 문전으로 치고 들어가며 수비수 두명을 제치고 왼발슛했지만 칸은 어미닭이 알을 품듯 우람한 가슴에 볼을 가뒀다.

치열했던 승부는 후반 30분 미하엘 발라크가 속공 찬스에서 결승골을 뽑아내며 칸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운재가 발라크의 첫 슛을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튀어나간 볼을 발라크가 대시하던 탄력을 살려 재차 슛, 그물을 흔들었다. 이 상황이라면 칸이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의 결승 진출로 칸이 야신상에 좀더 가까이 갔지만 세계 최고의 공격수들을 상대하며 조금도 위축됨없이 절정의 수비력을 발휘한 이운재 역시 세계 축구팬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아로새겼다.

문병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