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경험이 연기력 밑거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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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9면

"어머, 햇살이 여름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카페 밖 마당으로 나가자마자 황신혜는 탄성을 자아냈다. 일직선으로 내리꽂는 햇살을 손으로 한 움큼 집으며 "참 좋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드라마 '위기의 남자'를 촬영하느라 지난 두달간 장충동 집에서 차, 차에서 세트장으로 이동하며 정신없던 그녀였다. "정말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모르겠어요. 전날 나온 대본으로 급하게 연습하고 촬영에 들어가면 정말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아요." 잠시 동안의 여유마저도 사치스럽다는 뉘앙스다.

요즘은 휴일도 없다. 일주일에 4일은 드라마에, 나머지 3일은 영화 '패밀리' 촬영에 매달린다.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출연하는 걸 피하고 싶었지만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특히 '위기의 남자'의 금희는 욕심나는 배역이었다.

-남편의 불륜에 맞바람을 피우는 금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

"금희는 한국에서 살림하는 주부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배신하니까 모든 게 허물어지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녀가 말한 '허물어짐'은 그림으로 말하자면 극사실주의에 가깝다. 바람핀 남편을 다독여 돌아오게 하는 침착한 부인도, 남은 아이들이라도 사랑으로 돌보는 따뜻한 마음의 엄마도 아니다. 연지의 집에 찾아가 물건을 뒤집어 엎으며 "몰상식하고 무례한 아줌마라고? 개 같은 년"이라고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니네가 차려먹으면 손이 부러지냐"라며 쏘아붙이기도 한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듯한 야릇한 표정이 압권입니다. 연기가 성숙됐다는 평이 자자한데요.

"처음 대본을 받아들고는 많이 놀랐어요. 너무나도 사실적인 대사들이잖아요. 드라마라면 으레 착한 척, 예쁜 척, 도덕적인 척 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위선을 다 떨쳐버려도 돼요. 종전 드라마에서 볼 수 없던 제 모습에 다들 연기 잘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아요. 고마운 일이죠. "

모든 공을 작가에게 돌리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겪은 인생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놨다. 이혼 얘기를 꺼내려 하자 그 말은 하지 말자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과거의 아픔을 좋은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영민함을 지닌 듯했다.

-아이를 낳고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올해 초까지는 스쿼시·헬스·에어로빅 등 하루 1시간반 정도 운동을 했어요. 지금은 다른 운동을 해요. 촬영 운동, 하하하. 엄청 힘들어서 살이 찔 수가 없거든요."

그녀는 다섯살날 예쁜 딸이 있다. 요즘은 드라마에 신경쓰느라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다. 친정 어머니가 대신 집에 와서 아예 아이를 맡아 키워주는 형편이다.

-아이에게 미안하겠어요.

"내가 나오는 드라마라고 꼭 챙겨보더라고요. 준하랑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는 '엄마 왜 딴 남자랑 뽀뽀해'라고 질문해 좀 당황했었죠. 이후에는 밤 10시 전에 재우려고 하는데 잘 안되네요." 모녀 사이는 친구와 같다던가.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운 나이지만 딸 아이는 절대 칭얼대는 법이 없다. 엄마의 직업이 뭔지 잘 모르지만 TV에 나오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대견한 딸임에 틀림없다.

'위기의 남자'는 다음달 3일 18회로 막을 내린다.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금희와 준하의 사랑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과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미리 얘기하자면 결말은 후자 쪽이다. 금희는 아이들을 위해 사랑을 접고, 남편 동주는 연지가 더이상 불행해지는 게 싫어 집으로 돌아온다.

-결말이 예상했던 대로 끝나네요.

"나라면 애들 데리고 혼자 살겠어요. 서로 사랑하지도 않고 상처를 줄 대로 다 줬는데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까요. 금희가 일로 성공해 또 다른 사랑을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자신의 성격 만큼이나 똑부러지는 결론이다.

"이제 황신혜 자신으로 돌아와아죠." 드라마 촬영 내내 '위기의 남자' OST를 들으며 금희에 몰입했다는 그녀의 소회다. 6월말 영화 촬영이 끝나면 가족끼리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게 지금 가장 큰 소망이다.

글=박지영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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