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유럽 정보기관 9·11 암시 결정적 증거 묵살 "막을 수 있었던 人災" 비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우리의 주된 목적은 비행기를 이용해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야."

"기억해 둬.구름이 덮인 하늘에선 불길이 치솟을 거고, 세계의 모든 신문들이 대서특필할 거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는 29일 "이탈리아 경찰이 2000년 8월 미국에서 비행기와 관련한 테러가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알 카에다 조직원간의 대화를 그들의 차 안에서 도청했다"고 현지 언론을 인용, 보도했다.

이들은 대화에서 일년여 뒤에 발생할 테러 공격을 마치 미리 본 것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한 테러리스트는 "다음번 만날 땐 비행기 조각을 가져다 줄게"라며 "이번 계획을 만든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그는 천재지"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잡음이 많아 알아듣기 힘들다"며 흐지부지 처리해 버렸다.

미국·유럽의 정보기관과 경찰이 테러를 암시하는 결정적인 정보들을 입수하고서도 무력하게 대응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9·11 테러는 불가항력(可抗力)의 참사가 아닌,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인재(人災)였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탈리아 경찰은 알 카에다 조직이 2001년 1월 "우리 형제들이 미국에 간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말라. 이 계획은 특급 비밀"이라고 말한 것도 도청했다.

만약 미 연방수사국(FBI)·중앙정보국(CIA) 등 미 정보기관과의 유기적 협조를 통해 알 카에다의 테러에 대비한 경계·예방 업무를 강화하고, 빈 라덴 체포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상황은 사뭇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FBI는 최근 ▶알 카에다 조직원들이 미 항공학교에서 테러 훈련을 받고 있다는 요원들의 첩보를 무시하고 ▶9·11 테러 관련 용의자의 컴퓨터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 청구까지 기각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FBI의 로버트 뮬러 국장은 29일 "우리가 입수한 모든 단서들을 적절히 분석했다면 사전에 테러 계획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처음으로 잘못을 인정했다.그는 "FBI가 타성에 젖어 있었다"며 책임을 통감했지만 '소 잃고 난 뒤 외양간 고치기'였다.

김준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