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는 삶의 기쁨 안해본 사람은 몰라요"<월드비전 친선대사 박 상 원.난민운동가 한 비 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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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예수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남을 도우려면 표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박상원(43)·한비야(44)씨에게 예외다. 그들은 이웃 사랑의 '습관론''모방론'을 강조했다. 눈 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서 어찌 은인자중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여름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뿌렸던 지난 주말 서울 강남의 선릉. 한씨는 "이 비가 아프가니스탄에 내렸으면 정말 좋겠어요"라며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했다. 3월 중순부터 6주간 가뭄의 땅 아프간에서 긴급 구호활동을 펼치고 돌아온 그다. "펄펄 날리는 아프간의 흙먼지가 밀가루였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생대회로 선릉에 나왔던 여중생들이 박씨를 보고 몰려들었다. "오빠, 삼촌, 너무 잘 생겼어요"를 연발하며 달려든다. 박씨가 예의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한다. 이 장면을 본 한씨. "보세요, 이렇게 인기 있는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영향력도 대단하겠죠. 이런 분이 힘을 받도록 더 열심히 뛰어야겠어요"라며 웃었다.

'브라운관의 신사' 박상원씨와 '바람의 딸' 한비야씨가 만났다. TV와 출판의 대어급 스타인 그들이 함께 나누는 삶을 얘기했다. 박씨는 연예인 중 보기 드물게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4일까지 국제적인 비정부기구(NGO)월드비전의 친선대사 자격으로 북한을 다녀왔고, 또 곧바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프간 난민돕기 모금 행사에도 참여했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한비야의 중국견문록』으로 유명한 오지 여행가 한씨는 지난해 말 국제 난민운동가로 변신, 최근 아프간에 한국인의 사랑을 전하고 왔다(중앙일보 '사람, 그리고' 섹션에 '한비야의 헤라트 편지' 9회 연재). 각기 가는 길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하나인 그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정겹게 보였다.

▶박상원=1985년 남북 예술단 교환 공연 이후 17년만에 북한을 방문했어요. 월드비전이 지원해온 북한 국수 공장을 둘러보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평양의 씨감자 공장 준공식에 참가했습니다. 앞으로 씨감자는 북한 식량난 해결에 대단한 기여를 할 것 같습니다. 적은 양으로도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획기적 품종이거든요.

▶한비야=아프간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굶주림이 가장 큰 공포였어요. 4년 내내 가뭄이 들어 말 그대로 풀만 먹고 살았거든요. 올해도 씨를 뿌릴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우리 돈으로 1천3백원이면 5인 가족의 사흘치 식량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걸하지 않습니다. 가장 필요한 건 밀씨라고 했어요. 첫 수확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거지요.

박씨가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일한 지는 벌써 8년. 연기자와 봉사자란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직함을 갖고 생활해왔다. '연예인은 공인'이라는 말을 환기할 때 모범적인 사례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아프리카 기아현장, 남미 지진현장 등을 찾아다녔다.

"99년 콜롬비아 지진현장에서 겪은 일입니다. 6·25에 참전한 사람의 집에 갔었는데, 고(故)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갖고 있는 등 한국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뭔가 오래된 숙제를 푼 것 같더라구요."(박상원)

한씨가 거들었다. "그만큼 NGO가 중요해진 거죠. 정부는 아무래도 발이 느리잖아요. 사람을 구하는 일,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해야 할 일, 이 3박자가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는 요즘만큼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이 일을 하려고 그렇게 지구촌 오지를 찾아다녔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如一見)이라고 했나요, 더 중요한 건 백견(百見)이 불여일행(如一行)입니다."

박씨가 자기 고백을 했다. "처음부터 마음 속에 우러나서 이웃을 돕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도 처음엔 주변의 요청 때문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죠. 고민도 많았어요. 혹시 생색만 내는 일을 하는 건 아닌지…. 그런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남을 돕는다는 건 흉내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당당해요. 이웃의 선행에 대해 색안경을 끼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게 가짜 행동이라도 그 가짜가 많아지면 진짜도 늘어나는 법이죠."

한씨가 "맞아요, 맞아요"라며 운을 맞춘다. "확실히 베테랑이시네요. 한수 배우는 느낌입니다. 나누는 삶은 분명 버릇이자 습관입니다. 그 짜릿한 맛에 한번 길들면 벗어나기 어렵죠. 오지여행도 남는 '장사'였는데 요즘은 긴급구호 때문에 말도 안꺼내요."

말하자면 사랑의 감염론이다. "재앙은 계속될 겁니다. 혹시 알아요, 미국이 언제 도움을 받을지."(박상원),"아프간의 오늘은 6·25 때의 한국과 다름이 없다"(한비야)라는 그들의 말에서 지구촌을 감싸는 큰 마음이 느껴졌다.

인터뷰가 끝나자 박씨는 올 가을께 방영될 SBS 사극 '대망' 촬영장으로 향했다. '모래시계'의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가 다시 뭉친 이 드라마에서 박씨는 작은 상인으로 출발해 경제를 장악하는 조선 후기의 거상을 연기한다. '모래시계'의 정의파 검사에서 야망이 가득한 전략가로 변모하는 그의 얼굴이 기다려진다. 한씨는 스리랑카에서 열리는 월드비전 긴급구호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25일 출국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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