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 떼내면 새 기억 못만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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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1950년께 미국인 HM은 심각한 간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3년 뒤인 53년 간질병의 원인이 되는 뇌의 중앙측두엽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뇌의 일부인 손가락만한 크기의 해마도 함께 떼냈다.

해마가 없어진 HM에게는 예상 밖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수술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매일 아침 HM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의사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설명해도, 그 순간에는 이해하는 듯하다가 금세 다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잊어버리곤 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HM은 과거 뇌수술을 한 날 이후의 기억은 전혀 못한다. 매일 '새로운 인생'을 사는 셈이다.

그런데 HM은 수술 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기억못하는 반면에 수술 전에 겪었던 일은 거의 완벽하게 기억했다. 기왕의 "기억" 그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로운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 뿐이었다. 뇌과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전방 기억상실증"라고 부른다.

HM의 케이스가 소개된 이후 뇌과학자들은 비슷한 여러 다른 환자들을 통해 어떻게 인간이 기억을 하는지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다.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개별 신경세포로부터 나온 정보들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사과를 보면서 그 이름이 '사과'라는 것을 듣는다면, 사과의 시각적,청각적 정보들이 거의 동시에 뇌에 도착하기 때문에 이 정보를 가진 신경세포들의 연결성은 강해지게 된다. 그래서 그후 사과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과의 모습이 자연히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에서 정보들의 연합으로 학습되는 것을 '헤비안 학습 (Hebbian learning)'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신비가 아직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헤비안 학습을 하는 동안 신경세포들 사이의 연결성들은 점점 단단해지면서 신경세포의 연결부인 '시냅스(synapse)'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게 된다.

일종의 문과 같은 시냅스들은 정보의 양에 따라 열리는 정도가 다른데, 연합된 정보가 동시에 시냅스에 들어오면 이 문들은 활짝 열리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나중에 비슷한 정보나 힌트가 시냅스에 도착하면 그에 관련된 나머지 정보도 금방 떠오른다.

'헤비안 학습'은 해마에서 이뤄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하는 하드디스크가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조합하여 기억을 만들어내는 컴퓨터의 램(RAM)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HM은 해마가 없어졌어도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어 그 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까지 새로운 기억이 해마에서 만들어진 후 어디로 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기억의 모든 정보가 뇌의 전부위에 걸쳐 분배되어 나타내진다고 믿고 있다.

'사과'의 기억은 시각영역에 나타난 사과의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영역에 나타난 사과라는 소리 그 자체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기억 한다는 것은 물체가 없는 상황에서도 과거에 경험하거나 보았던 상황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으로, '다시 본다' 또는 '다시 듣는다'의 개념이다. 이는 사과라는 물체가 뇌의 어떤 영역에 따로 입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사과를 봤을 때 그 모습과 소리가 다시 떠오른다는 뜻이다.

기억은 한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저장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체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뇌 전체가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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