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걸씨 빼돌리기 007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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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통령 아들 귀국 연막작전은 007영화의 조잡한 복사판 같다. 청와대가 연출하고 국정원·검찰이 조연으로 등장한 듯한 14일의 기자 따돌리기 작전은 짜임새(?) 있게 진행됐다. 홍걸씨의 입국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은 채 이뤄졌다. 작전 성공에 대해 권력 핵심부에선 쾌감을 느꼈겠지만, 국민은 "김대중 정권은 아직도 정신 못차렸다"고 기막혀 할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이런 작전이 펼쳐진 것은 대통령 아들 비리를 둘러싼 민심의 분노를 청와대가 깨닫지 못한 탓이라는 게 국민 판단인 것이다.

국민을 더욱 어이없게 만든 것은 역(逆)정보 흘리기,양동작전, 현장에서 바람잡이 등 역할분담이다. 홍걸씨 귀국설이 퍼지기 시작한 당일 오후부터 기자들의 확인 요청에 청와대 관계자들은 "아직 미국에 있다. 검찰이 15일 오후 2시에 출석하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오리발을 내밀면서 '검찰이 너무 심하다'며 능청맞은 원망을 섞기도 했다. 인천공항에선 국정원 직원과 경찰 병력이 엉뚱한 출구 쪽에 배치돼 기자들을 묶어두었고, 검찰은 홍걸씨의 귀국을 사전에 아예 모른 것처럼 행동했다.

정권 수뇌부의 이런 행태는 金대통령에 대한 충성이겠지만 그것은 국민에 대한 기만행위다. 국민은 홍걸씨가 귀국할 때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서민들을 울분에 떨게 한 비리 의혹에 대해 최소한의 반성과 사죄의 장면을 기대했다. 그랬다면 金대통령이 겪고 있는 아들 탈선에 대한 회한과 번뇌를 다소나마 이해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홍걸씨는 사죄의 모습은커녕 비리를 낳은 비뚤어진 특권 의식에 젖은 채 숨어들어왔으니 국민의 배신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거기엔 대통령 아들 수사가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붙어 있다. 이제 청와대의 땅에 떨어진 신뢰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돼 버렸다. 청와대를 의식하지 않는 검찰의 냉정한 수사만이 이런 민심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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